은공隱公(B.C.722~712)

은공隱公(B.C.722~712)


『춘추』는 노나라의 역사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노나라 군주를 기준으로 사건을 배열한다. 『맹자·만장하萬章下』에서 공·후·백·자·남 등의 오등 작위를 언급한 이후로 『예기·왕제王制』와 『백호통·작편爵篇』에서 이를 잇고 있다. 그러나 서주와 동주 시대의 이기彛器 명문을 고찰해 보면, 명문에서 국군을 지칭한 것이 『춘추』와 다를 뿐만 아니라 명문 자체에서도 동일 국가의 국군을 지칭하는 방법도 서로 다른 것이 많다. 양수달 선생의 『적미거소학술림·고작명무정칭설古爵名無定稱說』에 보면 이에 대한 설명이 매우 자세히 근거를 갖추어 설명하고 있다. 현전하는 노나라의 이기 중 “노후魯侯”라고 칭한 것이 4차례, “노공魯公”이라 칭한 것이 1차례 있다. 그리고 『상서·비서費誓』에서는 노후魯侯 백금伯禽의 맹세를 기재하고 있는데, 그 첫머리를 “公曰”이라 시작하고 있다

노나라의 성은 희성姬姓으로서 문왕의 아들인 주공의 후예다. 주공은 주나라 왕실을 보좌했기 때문에, 성왕은 그의 아들 백금을 곡부曲阜에 제후로 봉했다. 『좌전·정공4년』”상엄의 백성들을 다스리기 위해 백금을 옛 소호씨의 터전에 제후로 봉했다(商奄之民命以伯禽而封於少皞之虛)”란 기사가 이를 반영한다. 공경한龔景澣에 따르면, 노나라의 도읍은 두 곳이 있었는데, 곡부와 엄성奄城으로서 옛 엄국의 도읍이다. 두 성의 거리는 3리 정도이다. 곡부는 동북쪽으로 현재의 산동성 곡부현 북쪽에 있는 고성촌古城村에 해당한다. 엄성은 서남쪽인데 현재의 곡부현이다. 노나라는 처음에는 곡부에 도읍을 정했지만 양공煬公 때에 엄성으로 옮겼고; 춘추시대에 다시 곡부로 옮겼다. 희공僖公 때의 일이다. 『담정재문초澹靜齋文鈔·노도고魯都考』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1977년 이 곳에 대한 발굴을 진행하였는데 노나라 도성의 평면은 약간 불규칙한 장방형이고, 성의 동서 길이 중 가장 긴 곳 3곳이 7킬로미터이고, 남북으로도 가장 먼 곳 두 지점의 거리가 7킬로미터 정도로써 대략 그 면적은 10평방킬로미터에 해당한다. 성의 주위는 해자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서북 양쪽의 해자는 수수洙水의 물길을 이용했다. 현재의 곡부현 현성은 대략 노나라 옛 성의 서남쪽 일부분에 해당한다. 옛 성의 성문은 11개가 있었고, 동쪽과 서쪽 그리고 북쪽에 각각 3개씩 있었고 남쪽에 2개가 있었다. 노나라의 궁전은 성 안에 자리잡고 있었다. 둘러쳐진 성의 동북부 아래와 성 안의 서북쪽과 서남쪽에 노나라 옛 성 이전 시기의 거주지역이 있다. 혹 상엄의 옛 유적지가 아닌가 싶다.

『사기·노세가』에 따르면, 백금으로부터 은공까지 13명의 군주가 있었다. 은공의 이름은 식고息姑이고 『사기·노세가』는 식이라고 적고 있다. 하지만 이는 당나라 이후의 『사기』에서 글자가 누락된 것으로서 식고가 옳다. 은공은 백금의 7세손, 혜공 불황弗皇의 아들이며 모친은 성자聲子이다. 주나라 평왕平王 49(B.C.722)에 즉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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