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산전쟁 1. 정나라 상인 현고弦高 (춘추좌전.5.33.1.)

희공 33년 봄, 의 군대가 주나라의 북문을 지나쳤다. 전차병들이 투구를 벗고 내렸다가 용맹을 자랑하며 뛰어오른 전차의 수가 300대였다. 왕손만王孫滿은 당시 어렸는데 이 광경을 보고 양왕에게 아뢰었다. “진군이 경솔하고 무례하니 반드시 패할 것입니다. 경솔하면 지략이 부족하고 예가 없으면 생각이 짧습니다. 험지로 들어가면서 사려가 깊지 않고 또 지략도 없으니 패전하지 않겠습니까?

진군이 활에 이르렀을 때, 정나라의 상인 현고弦高가 주나라로 장사를 하려고 가는 길에 진군과 마주쳤다. 그는 먼저 네 장의 소가죽을 예물로 주고 소 12마리를 진군에 바치며 말했다. “과군께선 귀하가 군을 인솔하여 폐읍으로 행군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시고 종자들을 대접하라 하셨습니다. 폐읍이 변변치 못해 종자들이 오래 머무신다면 하루 분의 식량을 준비하겠고, 행군하신다면 하루 저녁 호위를 하라 하셨습니다.” 현고는 또 파발을 보내 정나라에 이 사실을 알렸다.

정 목공이 사람을 보내 (나라 사람들이 머물고 있는) 객관을 살피게 했더니 그들은 전차에 짐을 꾸리고 무기를 날카롭게 벼리며 말을 먹이고 있었다. 황무자皇武子를 시켜 그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그대들이 폐읍에 머문 지 오래되어 말린 고기와 날고기가 모두 고갈되었습니다. 길을 떠날 준비를 위해 우리나라에 원포原圃가 있습니다. 귀국의 구유具囿와 비슷한 곳이지요. 그곳에서 식량으로 쓸 사슴들을 직접 잡으면 우리의 일손을 덜어줄 수 있을 텐데 어떠십니까?” 이 말을 들은 기자杞子는 제나라로 도망쳤고, 봉손逢孫과 양손楊孫은 송나라로 도망쳤다.

맹명孟明이 말했다. “정나라에 대비가 있으니 승리를 기대할 수 없다. 공격해도 이길 수 없고 포위를 한들 지원을 기대할 수 없으니 돌아갈 것이다.” 맹명은 활나라를 침략한 후 귀국길에 올랐다.


원문

三十三年春[1]師過北門左右免而下超乘者三百乘. 王孫滿觀之言於王曰: 師輕而無禮必敗. 輕則寡謀無禮則脫. 入險而脫又不能謀能無敗乎?

商人弦高將市於遇之, 以乘韋先牛十二犒師: 寡君聞吾子將步師出於敝邑敢犒從者. 不腆敝邑爲從者之淹居則具一日之積行則備一夕之衛.且使遽告于.

鄭穆公使視客館則束載·厲兵·秣馬矣. 使皇武子辭焉, : 吾子淹久於敝邑唯是脯資·餼牽竭矣, 爲吾子之將行也之有原圃之有具囿, 吾子取其麋鹿以閒敝邑若何?杞子逢孫·楊孫.

孟明: 有備矣不可冀也. 攻之不克圍之不繼吾其還也.而還.



[1] 완각본에는 “”이 “”앞에 있지만, 『교감기』에 근거하여 삭제.


관련 주석

三十有三年春王二月: 동지는 212일 신사일이고 건해이며 윤월이 있다.

人入: 은 국명으로 『좌전·장공16년』과 『좌전·희공20년』의 주석에 자세하다. 『좌전』에선 활나라를 멸했다고 쓰고, 『춘추』에선 활나라에 입했다고 쓴 까닭은 비록 진이 활을 멸하긴 했지만 그 땅을 소유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좌전·양공29년』에 “우·괵·초·활·곽·양·한·위 모두 희성의 나라이며, 이 나라들을 병탄하여 나라가 커졌다. 만약 소국들을 침략하여 병탄하지 않았다면 진이 어디서 땅을 취할 수 있었겠는가?”라는 기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 활은 진나라에 병탄되었다.

 

춘추좌전 지도 - 주나라 경사

三十三年春秦師過北門: 완각본에는 “”자 앞에 “”이 더 있지만 『교감기』를 따라 삭제했다. 강영의 『고실』: “북문의 이름은 건제乾祭이다. 소공 14년에 보인다.

左右免而下: 고대의 병거에 만약 장수가 타지 않았다면 병거를 모는 이가 가운데, 활쏘는 이가 왼쪽, 창과 방패를 든 용사가 오른쪽에 위치한다. 장수가 탔거나 혹 천자/제후가 직접 장수로 탔을 때는 중앙의 북 아래에 위치하고, 말 모는 이가 왼쪽, 창과 방패를 든 이가 오른쪽에 위치하는데 이 사람을 융우라고 한다. 본문에선 일반적인 병거이기 때문에 사수와 용사가 전차에서 내리고 마부는 내리지 않고 그대로 전차를 몰고 갔다. 『여씨춘추·회과편』: “천자의 성을 지날 때는 갑병들이 모두 전차에서 내려 천자에게 예를 차리는 것이 마땅하다.” 면주는 투구를 벗은 것이지 갑옷까지 벗은 것이 아니며 또한 필시 군사들을 질서있게 단속한 것이 아니어서 모두 당시의 예법에 부합된 행동이 아니었다.

超乘者三百乘: 『여씨춘추·회과편』: “내렸다가 다시 올라탄 수레의 수가 오백승이었다(超乘者五百乘).” 단 『예기·상복소기喪服小記』의 공영달의 『소』는 그대로 “삼백승”으로 인용하고 있다. 『국어·주어중』역시 “다시 올라탄 병거가 삼백승이었다”라고 적고 있다. 초승超乘이란 필원畢沅 『여씨춘추신교정』을 보면 “수레에서 내렸다가 다시 수레에 올라타는 것으로서 용맹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설문』은 초에 대해 “뛰어오르다(跳也).”라고 풀이하고 있어 필원의 설명이 믿을만하다. 『좌전·소공원년』의 “超乘而出”역시 자남子南 전차에 솟구쳐오르는 것을 말한 것이므로 이를 입증할 수 있다.

王孫滿: 『통지·씨족략4』에서 『영현전英賢傳』을 인용, “주 공왕共王 낳았고, 어의 증손이 만滿이다.”라고 설명한다. 다만 양리승의 『보석』은 “공왕은 목왕의 아들이고, 목왕의 이름이 만이다. 6세손이 어떻게 만이란 이름을 쓸 수 있는가?”라고 반박하고 있다. 『통지』의 설명은 믿을만한 주장이 아니다.

觀之言於王曰: 師輕而無禮: , 경솔함은 수레에 솟구쳐 뛰어오른 행동을 가리킨다. 군사가 경솔하여 장중한 맛이 없음을 말한다. 무례란 투구만을 벗고 갑옷을 벗지 않은 군사들을 단속하지 않아 천자의 문을 지나면서 불경했던 일을 말한다.

必敗. 輕則寡謀無禮則脫: 생각이 세밀하지 못함(簡易)의 뜻으로 오늘날의 소략함의 뜻.

入險而脫: 이란 효산을 가리킨다.

又不能謀能無敗乎?: 주석 없음.

춘촤저전 지도 - 활나라


商人弦高將市於: 『여씨춘추·회과편』은 “정나라 상인 현고와 해시奚施 주나라 서쪽에서 장사를 하려다”라고 적었고, 『회남자·인간편』에선 “정나라의 현고와 건타蹇他”라고 전하여 현고 외에 무리가 있었다. 「진본기」와 「진세가」는 『좌전』을 따라 현고만을 적고 있다.

遇之, 以乘韋先牛十二犒師: 승위乘韋는 삶아서 만든 네 장의 소가죽이다. 공영달의 『소』: “승거乘車 네 마리의 말이 끈다. 그래서 승 넷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예』에 보면 승시乘矢라고 하는데 이는 화살 네 개를 가리킨다. 본문의 승위 역시 네 장의 가죽이란 뜻이다.” 선은 고대의 치송 시의 예물로서 먼저 자그마한 예물로 손님을 맞이한 후 떠날 때 보다 큰 예물을 드리게 된다. 『좌전·양공19년』: “순언에게 비단 묶음에 더해 옥과 네 마리 말을 뇌물로 주었다. 오나라 수몽의 정을 바치기 전이었다(荀偃束錦加璧乘馬, 吳壽夢之鼎).”는 기사와 『노자』의 “공벽을 네 마리 말이 끄는 수레에 앞세워(雖有拱璧以先四馬)”등으로 입증할 수 있다.

: 寡君聞吾子將步師出於敝邑: 행의 뜻. 보사는 행군行軍 같은 말이다.

敢犒從者. 不腆敝邑: 두터움. 부전 운운은 당시의 상투어이다. 다음은 그 예이다. 『좌전·문공12년』: “보잘 것 없는 그릇이니 사양할 필요 없습니다(不腆敝器不足辭也), “선군께서 지니셨던 보잘것없는 물건이나 소신을 시켜 국정을 담당하시는 분께 드리라고 하셨으니 징표로 삼아(不腆先君之敝器使下臣致諸執事以爲瑞節), 『좌전·성공2년』: “허약한 군사이긴 하나 이른 아침에 만나 싸우길 원합니다(不腆敝賦詰朝請見), “변변치 못한 우리 군사로 그대와 교전했지만(不腆敝賦以犒從者), 『좌전·양공14년』: “우리 선군이신 혜공께선 변변치 않은 땅이지만 그대들에게 나누어 주어 먹고 살게 하셨소(我先君惠公有不腆之田與女剖分而食之)” 등의 사례로서 입증할 수 있다. 비단 땅과 군사 그리고 사물을 대상으로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람 역시 대상으로 할 수 있다. 『좌전·소공3년』의 “선군의 변변치 못한 적녀를 진나라의 내관으로 충당시켜(不腆先君之適以備內官)” 부전을 무전으로 쓸 수도 있다. 『좌전·소공7년』의 “정나라가 비록 변변치 못하나(雖無)”가 그 예다.

爲從者之淹: 의 뜻. 『좌전·성공2년』: “귀국 군주의 땅에 군사를 오래 머물지 않도록 명령하셨습니다(無令輿師淹于君地)”의 淹于君地 久於君地. 그러므로 엄구淹久역시 동의사의 연용이다. 『좌전·선공12년』의 “二三子無淹久”가 그 예다.

居則具一日之積: 우마와 사람을 위한 꼴과 음식 등 여러가지 물품으로서 소고기와 양고기 등을 포함한 식품이다. 『주례·추관·대행大行』의 손이양의 『정의』에 자세한 설명이 있다. 두예: “적이란 꼴과 쌀 야채 그리고 땔감 등이다.

行則備一夕之衛.且使遽告于: 차는 한편으론 군사를 호위하고 한편으로 정나라에 이 사실을 알림이다. 두예: “거 파발傳車 말한다.” 전거는 후대의 역마와 유사하다. 고대에 긴급한 공문을 전달할 때 이용했는데, 일정한 거리마다 역을 두어 말을 갈아타고 신속히 전달할 수 있게 했다. 『여씨춘추』에선 이 일에 대해 “해타를 급히 보내 알렸다.”고 적고 있어서 거를 신속히라는 뜻으로 풀었다. 역시 뜻이 통한다.

鄭穆公使視客館: 객관은 진나라의 기자·봉손·양손 등 세 사람이 거처하는 곳으로 정나라에서 그들을 객례로써 대우하고 있었다.

則束載·厲兵·秣馬矣: 는 전차에 싣을 물건들을 잘 정리해 놓음이다. 병기도 이미 연마해놓고 말 역시 배불리 먹여 진나라 군사가 도착하기를 기다라고 있었다. 진나라 군사와 내응할 준비를 한 것.

使皇武子辭焉: 양식이 부족함에 대해 말하는데, 실은 그들의 모의를 알고 있음을 보인 것이다.

: 吾子淹久於敝邑唯是脯資·餼牽竭矣: 말린 고기를 포 한다. 두예: “자 식량이다.” 심흠한의 『보주』에선 “포자는 돈을 버는 수단으로서의 도끼(斧資)라고 써야 옳다. (『역』)의 「旅九四」에 ‘여행지에서 돈을 벌 도끼를 얻었으니(旅于處, 得其資斧)’라는 말이 있다.” 즉 그는 “포자”를 재물錢財 해석한 것으로 비록 일리는 있지만 다음에 나오는 사슴을 취하라는 문구를 근거로 보면 식량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는 살아 있는 짐승牲生 가리킨다. 소와 말인데 끌고 갈 수 있는 살아 있는 가축이다. “희견餼牽”은 동의사 연용이다. 문구의 뜻은 식량이 고갈됨이다.

爲吾子之將行也之有原圃之有具囿: 구유에 대해 노문초盧文 『종산찰기鐘山札記』와 왕인지의 『술문』에선 모두 산정전山井鼎의 『경고문經考文』에서 인용한 송본의 “구포具圃”를 따르고 있다. 양수경의 『수경·거수주소渠水注疏』역시 “구포”라고 쓰는 것이 옳다고 한다. 그러나 육조 권자본(즉 금택문고가 저본으로 삼은)과 돈황 육조 사본 그리고 『당석경』이하 제 본들을 모두 “구유”라고 쓰고 있으므로 그 주장은 따르지 않는다. 원포原圃는 정나라의 포전택이다. 『수경·위수주』에 따르면 “택은 중모현中牟縣 서쪽에 있는데 서쪽으론 장성 동쪽으로는 관도官渡 북으로는 거수渠水에까지 이르러 동서로 40리 남북으로 20(혹은 200리라고도 하나 여기서는 왕선겸의 합교본과 양수경의 『소』에 근거)리에 달한다. 택 안에는 모래 언덕沙岡 있는데 상하로 24개의 물가가 있으며, 나루터 작은 길로 서로 연결되어徑通 연못들이 서로 접하고 있다.” 구유具囿는 『회남자·지형편』의 양우택陽紆澤, 『이아』의 양우, 『산해경』의 양화지산陽華之山인데, 필원의 주석에 따르면 “지금은 양화수楊華藪라고 한다. 섬서성 화음현華陰縣 동쪽에 있고, 남쪽으로 동관潼關 이른다.” 심흠한 등은 이 곳을 『주례·직방씨』의 현포수弦蒲藪라고 주장하는데, 그렇다면 현 섬서성 농현隴縣 서쪽인데 정확하지 않다.

吾子取其麋鹿以閒敝邑: 그들 스스로 길 떠날 준비를 하게 하고 우리를 한가롭게 해 달라는 의미.

若何?杞子逢孫·楊孫: 동쪽으로 도망간 까닭은 진과 정의 군사가 서쪽을 방어하고 있을 것을 우려하여 잡히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다.

孟明: 有備矣: 맹명의 이 말은 현고의 앞서 말과는 시간적 거리가 있다.

不可冀也. 攻之不克圍之不繼: 계속해서 지원할 군사가 없다.

吾其還也.而還: 『회남자·인간편』에 “정 목공이 나라를 구한 공로로 현고에게 상을 내렸지만 그는 사양했다.”는 말을 적고 있다. 정나라가 현고에게 상을 내린 일은 충분히 개연성이 있는 일이다. 그러나 현고가 동이로 갔다는 것에 대해선 반드시 그렇게 볼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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