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산전쟁 전야 - 진문공의 죽음과 진목공의 정나라 정벌 (춘추좌전.5.32.3.)

겨울, 진 문공이 타계했다. 경진일(12 10), 곡옥曲沃에 빈소를 차리기 위해 도성인 강을 나설 때 시신에서 소리가 들렸는데 마치 소 울음소리 같았다. 복언卜偃이 대부를 시켜 관에 절하게 하고 말했다. “군주께서 군사軍事를 명하셨다: 장차 서쪽의 군대가 우리나라를 지날 때 공격하면 반드시 큰 승리를 거둘 것이다.” 

기자杞子가 인편을 통해 진나라에 보고했다. (5.30.3.) “정나라 사람들이 저에게 북문의 자물쇠를 맡겼으니 몰래 군사를 이끌고 오면 정나라를 차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목공이 건숙蹇叔에게 이 문제를 논의하자 그가 아뢰었다. “병사를 고생시키며 먼 나라를 급습한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아군은 피로로 힘을 소진하고 멀리 떨어진 적은 대비할 것인데 아마도 불가능하지 않겠습니까? 군이 움직이면 정나라가 필시 이를 알아채고 대비할 터이니 공격할 만한 곳이 없으면 필경 병사들의 반감만 살 것입니다. 또 천 리 길을 행군하는데 어느 누가 눈치채지 못하겠습니까?” 목공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목공은 맹명孟明, 서걸西乞 그리고 백을白乙 등을 소환하여 동문 밖에서 출정하게 명했다. 건숙이 통곡하며 말했다. “맹자야! 너의 출정은 보겠지만 귀환은 보지 못할 것이다!

목공이 사람을 보내 쏘아붙였다. “네 놈이 어찌 아느냐? 너의 수명이 육·칠십이었다면 벌써 무덤 주위에 심은 나무가 아름드리 자랐을 것이다.

건숙은 아들과 병사들을 통곡으로 배웅하며 말했다. “진나라가 필시 효에서 공격할 것이다. 효에는 두 개의 산이 있는데 남쪽 산에는 하후夏后의 묘가 있고, 북쪽 산에는 문왕이 비바람을 피하던 곳이 있다. 너희들은 필시 그 주변에서 죽을 것이다. 내 너희들의 유골을 그곳에서 수습하리라!” 진나라 군사는 결국 동쪽을 향해 떠났다.   


원문

晉文公. 庚辰將殯于曲沃. , 柩有聲如牛. 卜偃使大夫拜, : 君命大事: 將有西師過軼我擊之, 必大捷焉.

杞子使告于: 人使我掌其北門之管若潛師以來國可得也.穆公訪諸蹇叔. 蹇叔: 勞師以襲遠非所聞也. 師勞力竭遠主備之無乃不可乎? 師之所爲必知之勤而無所必有悖心. 且行千里其誰不知?公辭焉. 孟明·西乞·白乙, 使出師於東門之外. 蹇叔哭之, : 孟子! 吾見師之出而不見其入也!公使謂之曰: 爾何知? 中壽爾墓之木拱矣.蹇叔之子與師, 哭而送之, : 人禦師必於有二陵焉. 其南陵夏后皋之墓也; 其北陵文王之所辟風雨也. 必死是間余收爾骨焉!師遂東.


관련 주석

冬十有二月己卯: 기묘일은 9일이다.

晉侯重耳: 주석 없음.

 

晉文公. 庚辰: 경진일은 12 10일이다. 『춘추』에선 기묘일에 사망했다고 적었다. 경진일은 사망한 다음날이다.

將殯于曲沃: 진 문공의 조묘는 곡옥에 있기 때문에 그곳에 빈소를 차렸다. 『좌전』에 근거하면 춘추시대에 빈묘의 예가 있었는데, 상세한 것은 『좌전·희공8년』의 주석을 참조하라. 『원화군현지』는 진 문공의 묘는 강현絳縣 동쪽 20리 떨어진 곳에 있다고 하지만 근거는 알 수 없다.

춘추좌전 지도 - 진나라 강현絳縣


, 柩有聲如牛: 의 음은 구이다. 『예기·곡례』: “평상에 놓여 있을 때는 시, 관에 뉘여지면 구라 한다(在牀曰尸, 在棺曰柩).

卜偃使大夫拜, : 君命大事: 대사는 융사 즉 군사軍事이다. 『좌전·성공13년』의 “나라의 대사로는 제사와 군사가 있다.”를 참조.

將有西師過軼我: 경과 즉 지나감의 뜻. 후방에서 앞으로 튀어나옴이다. 『좌전·은공9년』의 “저들이 뒤에서 우리를 공격해올까 두렵소(懼其侵軼我也)”의 “일”과 같은 뜻이다. 過軼我의 뜻은 진 습격할 때 반드시 진나라의 남쪽을 지나야 하는데 그 지역을 지나면서도 길을 빌린다고 알리지 않고 지나치는 것을 말한다.

擊之, 必大捷焉.: 두예는 “복언은 진나라의 밀모 즉 정나라를 공격할 것이라는 소식을 전해들은 상태에서 시신에서 나는 소리를 빌미로 대중의 마음을 안정시킨 것이다.”라고 풀이했는데 매우 합리적이다. 『좌전』의 복서의 글을 보면 좌구명은 미신을 신뢰하여 견강부회한 설명이 많이 보이는데 반드시 그에 따라 해석할 필요는 없다.

杞子使告于: 人使我掌其北門之管: 은 오늘날의 열쇠와 같은 뜻. 『주례·지관·사문司門: “자물쇠를 주고받는 일을 관장한다(掌授管鍵), 『예기·월령月令: “자물쇠와 열쇠를 잘 간수하다(修鍵閉, 愼管鑰)” 등으로 입증할 수 있다. 마형의 『중국금석학개요상』(『범장재금석총고凡將齋金石叢稿)에 “열쇠를 만드는 방법이 전해진 것은 매우 적다. 일찍이 어떤 기를 본 적이 있는데, 머리 부분은 마치 갈고리처럼 구부러져 있고, 손잡이는 마디마디 서로 균형을 이루며 늘어나고 줄어들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윗부분에 ‘옹의 창고의 열쇠 무게는 두 근 일 량이며 명은 백일百一이다’라는 문구가 쓰여 있는데, 모양과 색채 등이 오늘날의 것과는 상당히 다르다.”는 설명이 있다.

若潛師以來國可得也.: 희공 30, 진나라는 기자 등 세 사람을 시켜 정나라를 수비하게 했었다. 「정세가」에선 “정나라의 사성司城 증하繒賀 정나라의 정황을 진에게 팔았다.”라고 기록하고, 「진세가」는 “정나라 사람이 진에 나라를 팔아 넘겼다.”고 전하며, 「진본기」역시 그런 내용이 있다.

穆公訪諸蹇叔: 『사기·진본기』에 “백리해가 사양하며, ‘소신은 신의 벗 건숙만 못합니다.’라고 말하니 목공은 후한 예물과 함께 사람을 보내어 건숙을 영접하게 하고 그를 상대부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또 「이사열전」에도 『간축객서諫逐客書』의 “건숙을 송에서 맞이했다”는 말을 기재하고 있다. 『정의』는 『괄지지』를 인용하여 “건숙은 기주 사람으로 그 때 송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송에서 그를 영접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사기·진본기』는 이 때문에 “목공이 건숙과 백리해에게 자문을 구했다.”라고 쓰고, 『공양』과 『곡량』은 “백리자와 건숙이 간언을 했다.”고 쓴다. 『맹자·만장상』의 “백리해는 간언하지 않았는데, 우공이 간언해도 소용없었던 일을 알고서 진나라를 떠났으니 그의 나이 70세였다.”는 말을 살펴보면, 진이 우나라를 멸망시킨 일은 희공 5년에 있었으므로 27년 전이므로 백리해의 나이는 이때 근 백세 혹은 이미 죽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좌전』에는 언급이 없는 것이다. 『여씨춘추·회과편』역시 이 일을 기록하고 있지만 백리해에 대해선 언급이 없다.

蹇叔: 勞師以襲遠非所聞也: 『여씨춘추·회과편』: “건숙이 간언을 올렸다. ‘정나라 정벌은 불가능합니다. 신이 알기로는 국도를 급습할 때 전차로는 백리를 넘을 수 없고, 보병으로는 30리를 넘을 수 없다고 합니다. 이런 경우에는 기세가 왕성하고 용력이 넘쳐 도착하기 때문에 적을 섬멸하고 신속하게 떠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수 천리 떨어진 곳을 행군하며 게다가 다른 나라의 땅을 넘어서 습격하는 경우인데 신은 이런 일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師勞力竭遠主備之: 원주는 정나라를 뜻한다.

無乃不可乎? 師之所爲必知之: 원주비지 즉 정나라가 알고 대비한다는 말을 보충 설명한다.

勤而無所: 은 수고스럽다의 뜻이다. 는 말 그대로 장소의 뜻. 즉 정나라가 습격을 미리 알고 준비할 수 있기 때문에 무력을 쓸 곳이 없다는 뜻.

必有悖心: 병사들이 수천리를 행군하여 왔는데 그 힘을 쓸 곳이 없다면 반드시 반감이 생긴다는 의미.

且行千里其誰不知?公辭焉: 두예: “사는 건숙의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뜻이다.” 죽첨광홍: “환공 13년의 ‘초나라 군주가 그 말을 수용하지 않았다(楚子辭焉)’가 한 예다.

孟明·西乞·白乙, 使出師於東門之外: 맹명은 다음 해 『좌전』에서 百里孟明視라고 쓰고 있다. 즉 백리가 그의 성씨이고 자는 맹명, 이름은 시이다. 「진본기」는 “백리해의 아들 맹명시와 건숙의 아들 서걸술西乞術 그리고 백을병白乙丙으로 군사를 이끌게 하였다.”라고 기술한다. 즉 맹명시를 백리해의 아들로 본 것인데 개연성이 있다. 그리고 서걸과 백을이 건숙의 아들로 보고 있지만 이는 오류로 보인다. 『여씨춘추·회과편悔過篇』에선 맹명시를 건숙의 아들로 보는데 이는 더욱 잘못된 내용이다. 다음에 이어지는 “蹇叔之子與師”를 보면, 건숙의 아들은 군대의 일원으로 참여한 것이지 장수로서 이끌었다는 뜻이 아니다. 『광운』의 서西자에 대한 주석을 보면, “서걸은 복성으로 『좌전』의 진나라 장수 서걸술”과 백자의 주석에 “백은 성이며 진나라 장수 백을병이 있었다.”는 설명을 하고 있다. 공영달의 『소』는 “술 필시 이름이다. 서걸과 백을은 혹 자일 수도 있고 씨일 수도 있는데 확실하지 않다.”고 설명한다. 장문풍張文 『루강일기속편螻江日記續篇』에서도 “진나라의 세 장수는 건숙의 아들이 아니다”라는 주제로 변론하고 있다.

蹇叔哭之, : 孟子!: 『당석경』을 처음 새길 때는 “맹자”라고 썼고, 닳아진 후 다시 고쳐 쓴 글자는 “孟兮”이다. 『석문』역시 “맹자는 판본에 따라 맹혜로 쓰기도 한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각본은 모두 “맹자”로 쓰고 있기 때문에 “혜”자로 쓴 것은 오류이다.

吾見師之出而不見其入也!公使謂之曰: 爾何知? 中壽爾墓之木拱矣.: 중수는 약간의 뜻인데, 그 설이 다양하다. 공영달의 『소』는 “상수는 120, 중수는 100, 하수는 80세”라고 설명하는데, 『양생경養生經(『문선』에 실린 손초孫楚 『정서관속송어섭양후작征西官屬送於涉陽侯作』에 대한 이선의 주석)에 근거한 것으로 너무 높이 잡은 것이 아닌가싶다. 『장자·도척편』은 “사람으로서 상수는 백세, 중수는 80, 하수는 60세”라고 하고, 『여씨춘추·안사편』에선 “사람의 수명은 길어도 백세를 넘길 수 없다. 중수는 60세를 넘지 못함이다.”라고 설명한다. 『회남자·원도훈』은 “사람의 중수는 70세이다.”라고 하며, 『논형·정설편正說篇』은 “상수는 90, 중수는 80, 하수는 70세이다”라고 말한다. 홍량길의 『좌전고』는 “본문의 중수는 80세 이하 60세 이상을 말한다.”라고 했는데 그럴듯하다. 두 손을 모으는 것을 공이라 한다. 이 문구의 뜻은 네(건숙)가 중수를 했더라면 이미 너의 무덤 위에 심은 나무가 자라서 한 아름은 되었을 것이라는 뜻. 즉 늙었는데도 죽지 않아서 정신이 혼미해져 그의 말은 쓸모 없음을 의미한다. 『역·계사하』에선 “고대에 사람을 매장하면서 나무를 심지 않는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태고 때의 일이다. 『백호통·붕훙편崩薨篇』에서 『예위·함문가含文嘉』의 내용을 인용한 것을 보면, “천자의 봉분은 높이가 삼인이고 소나무를 심고; 제후의 봉분은 천자의 절반이며 잣나무를 심고; 대부의 봉분은 높이 8척으로 하고 상수리나무를 심고, 사는 고분을 4척으로 하고 회화나무를 심으며, 서인은 봉분이 없고 버드나무를 심는다.”라고 한다.

蹇叔之子與師, 哭而送之: 『공양』과 『곡량』 그리고 『사기·진본기』는 모두 백리해와 건숙 두 사람이 아들을 보내면서 곡을 했다고 쓴다. 당시 백리해는 이미 죽었을 가능성도 있음은 앞에서 논의한 바 있다. 『여씨춘추·회과편』은 “건숙에겐 신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모두 이때 군사와 함께 정나라로 떠났다.”고 쓴다. 역시 건숙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다.

: 人禦師必於: “효”는 “효”라고도 쓴다. 효산은 현 하남성 낙녕현洛寧縣 서북쪽 60리 떨어진 곳에 있고, 서쪽으로는 섬현陝縣 동쪽으로는 민지현澠池縣 경계를 접하고 있다. 『상서·진서서소秦誓序疏』에 “효산은 산세가 험난하고 진 요처 관문이다. 에서 정나라로 향할 때 진의 남쪽, 남하의 효관崤關 지나 동쪽으로 정나라로 갈 수 있다. 예에 따르면, 征伐朝聘이란 것이 있는데 남의 나라를 지나갈 때 반드시 사신을 파견하여 길을 빌려야 한다. 진은 길을 빌려준 적이 없으므로 정벌한 것이다.

有二陵焉: 『설문』은 “릉이란 높은 언덕을 뜻한다(, 大阜也).”라고 풀이한다. 기실 릉과 산은 같은 뜻이다. 본문의 이릉이란 동효산과 서효산을 뜻한다. 『원화군현지』는 “동효산에서 서효산에 이르는 35리 길은, 동효는 기다란 제방 같은 길이 몇 리에 걸쳐 있고, 깍아지른 듯한 절벽 때문에 네모란 바퀴의 수레로는 갈 수 없다. 서효는 전체가 석벽 같은 길이 12리에 걸쳐있고 그 험난함이 동효와 다를 바 없다.”고 기술한다.

其南陵夏后皋之墓也: 남릉은 서효산이다. 「하본기」에 “공갑孔甲 죽고 아들 제고帝皋 즉위했다. 제고가 죽은 후 아들 제발帝發 즉위했고, 제발이 죽은 후에 아들 이계履癸 즉위했는데, 이 사람이 곧 하나라의 걸 임금이다.” 즉 하후 고는 걸의 조부이다.

其北陵文王之所辟風雨也: 북릉은 동효산이다.

必死是間余收爾骨焉! 師遂東: 『전』은 다음 해의 『전』에 이어져야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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