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융祝融과 육웅鬻熊 (춘추좌전.5.26.5.)

나라 군주가 축융祝融과 육웅에게 제사를 드리지 않자 초 성왕이 문책했다. 기나라가 대답했다. "우리 선왕 웅지熊摯병이 들어 귀신께 제사를 드렸지만 차도가 없어 스스로 초나라를 떠나 기 땅으로 숨으셨다. 이 때문에 우리는 초나라를 잃었는데, 무엇 때문에 그들에게 제사를 드리겠는가?” 가을, 초의 성득신과 투의신宜申이 군사를 이끌고 기나라를 멸하고 군주를 사로잡아 돌아갔다.


원문 (5.26.5.)

夔子不祀祝融人讓之. 對曰: 我先王熊摯有疾鬼神弗赦而自竄于吾是以失又何祀焉?楚成得臣·宜申帥師滅夔子.


관련 주석


人滅, 夔子: 『공양』에선 “기”를 “외”로 쓴다. 통가자이다. 그리고 “귀”로도 쓴다. 전해지는 이기에 □伯旣 있는데, 그 명문에서 ‘을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귀는 기를 가리킨다. 초주의 『고사고』에서도 “귀나라를 멸했다()”라고 적고 있다. 는 국명이고 초나라와 동성이다. 현재의 호북성 자귀현秭歸縣 동쪽에 기자성虁子城 있고, 기타虁沱 지명이 있는데 옛 기국에 해당한다. 伯旣에 “짐의 황고皇考기왕(幾王) 위해 이 준기를 제작하였다”라는 명문이 보이는데 이들은 왕을 자칭했다. 『예기·곡례하』: “동이·북적·서융남만 등은 비록 그들의 세력이 강성하다 해도 ‘’라 부른다. 그들 스스로는 왕王老으로 칭했다.” 초는 영윤 성득신의 이름을 쓰지 않고 인이라고 썼는데 희공 이전의 통례가 이와 같았다. 어떤 나라를 멸망시킨 후 그 군주를 사로잡아 간 사례는 이것이 최초이다.

 

춘추좌전 지도 - 초나라

夔子不祀祝融: 음은 육이다. 『사기·초세가』에 따르면, “초나라의 선조는 전욱 고양씨로부터 비롯되었다. 고양이 칭 낳고, 칭이 권장卷章 낳고, 권장이 중려重黎 낳았다. 중려는 제곡 고신 당시 화정火正의 직분을 맡아 그 공이 매우 커서 천하에 떨칠 만했다. 그래서 제곡은 그를 축융祝融 임명했다. 제곡이 중려를 주살한 후 그의 동생 오회吳回 중려의 후임으로 삼아 화정에 복직시켜 그가 축융이 되었다. 오회는 육종陸終 낳았고, 육종은 아들 여섯을 낳았는데 여섯째가 계련季連이고, 미성芈姓인데 초나라는 그의 후예이다. 주 문왕 당시 계련의 후예를 육융이라 했다.” 축융과 육웅은 모두 초나라의 선조이고, 는 초나라에서 갈라져 나온 나라이므로 고례에 따르면 제사를 지내는 것이 마땅했다. 전조망全祖望 『경사문답經史問答』에선 임·宿·수구須句 풍성風姓이고, 태호太皞의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태호는 천자인데, 임과 숙 등의 나라는 부용국으로서 그 제사를 드렸으므로 기 역시 당연히 제사를 드려야 한다. 

人讓之. 對曰: 我先王熊摯有疾鬼神弗赦: 즉 이전에 귀신에게 기도를 드렸지만 병이 낫지 않았기 때문에 귀신이 병을 낫게 해주지 않았다고 말했다.

而自竄于: 『당석경』은 “찬(숨다)”자를 본래 “우”로 썼다가 지우고 다시 “찬”으로 고쳐쓰고 있다. 「초세가」: “웅거熊渠 세 아들을 낳았다. 이때는 주 이왕夷王 시대인데, 왕실이 쇠미해지자 제후가 조회하지 않고 서로 정벌하기도 했다. 웅거가 장강과 한수 사이의 백성들의 인심을 얻어 그의 장자 강 구단왕句亶王으로 세우고 둘째 홍 악왕鄂王으로, 셋째 집자執疵 월장왕越章王으로 세웠다. 웅거가 죽자 아들 웅지홍熊摯紅 즉위했는데, 그의 동생이 지홍을 시해하고 스스로 즉위했다. 그가 웅연熊延이다.” 즉 『좌전』의 웅지는 『사기』의 지홍이다. 그런데 지홍은 웅거의 둘째아들로서 초왕으로 즉위했다가 그의 동생에게 시해되었으니 『좌전』과는 다르다. 『사기색은』에선 초주의 『고사고』를 인용하여 “웅거가 죽은 후 아들 웅상熊翔 즉위했고, 그가 죽자 장자 지 병이 있어서 소자 웅연熊延 즉위했다.” 『정의』는 『악위樂緯』의 송균宋均 주석을 인용하여 “웅거의 적통 후계는 웅지이다. 그가 악질이 있어 후계가 되지 못하고 따로 기에 봉건하여 초의 부용국으로 삼았다. 그의 후예들을 기자夔子라고 부른다.” 웅지가 웅거의 손자 혹은 적사라고 해도 그가 병이 있어 후사를 잇지 못했다는 점은 『좌전』과 같다. 『국어·정어』는 “미성은 기와 월이고 명을 받기에는 부족했다.”고 기술하는데, 위소는 “웅역熊繹 6세손 웅지에겐 병이 있어서 초나라 사람들이 그를 폐하고 그의 동생 웅연을 세웠으며 웅지는 스스로 기로 떠났다. 그의 자손들이 공이 있어서 왕이 그들을 기자夔子로 임명했다.”고 적고 있다. 『사기』에 따르면, 웅지는 마땅히 주 여왕과 선왕의 시대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吾是以失又何祀焉?楚成得臣·宜申帥師滅: 성득신은 영윤 자옥이다. 투의신은 사마자서이다.

夔子: 『사기·초세가』는 성왕 39년의 일로 기록하고 있지만 『좌전』에 따르면 38년의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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