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영穆嬴과 조돈, 영호令狐전투 (춘추좌전.6.7.4.)

강공이 공자옹公子雍을 진으로 호송하며 말했다. “문공이 입국할 당시 호위가 없어 여생과 극예의 반란이 발생했다.( 5.24.1.) 그래서 그에게 많은 보병을 호위로 딸려 주었다. 목영穆嬴은 태자를 안고 조정에서 울부짖었다. “선군이 무슨 죄인가? 그의 후계자는 또 무슨 죄인가? 적자를 버려 옹립하지 않고 밖에서 군주를 영접해 온다면 장차 이 태자는 어떻게 할 것인가?

목영은 조정을 나와 태자를 안고 조씨의 집으로 가 선자에게 고개를 조아리고 말하였다. “선군이 이 아이를 안고 그대에게 부탁하셨소. ‘이 아이가 재목이 된다면 나는 그대의 은혜를 입은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대를 원망할 뿐이다.’ 이제 비록 선군께서 돌아가셨지만 그 말은 여전히 귀에 선한 데 당신이 그 말을 저버린 것은 무슨 이유인가?

선자와 여러 대부들은 목영이 두려웠고 또 자신들을 핍박할까 두려웠다. 그래서 공자옹을 모시러 갔던 선멸先蔑을 배신하고 영공(태자)을 옹립했으며 공자옹을 호위해 오는 진의 군사들을 막기로 했다. (상군의 장수) 기정箕鄭이 국도를 수비하기로 했다.

조돈이 중군을 지휘하고 선극先克이 그를 보좌했다. 순림보荀林父(기정을 대신하여) 상군을 지휘하고, 선멸이 하군을 지휘했으며 선도先都가 그를 보좌했다. 보초가 어융이었고 융진이 거우가 되어 출정하였다.

근음(산서성 임의현臨猗縣 동쪽)에 이르러 선자가 말하였다. “만약 우리가 진의 공자옹을 받아들인다면 진군은 손님이나 상황이 그렇지 않으므로 적이다. 이미 용납하지 않기로 결정했는데 다시 진격을 늦추면 장차 진은 딴 생각을 품을 것이다. 선제 공격으로 적의 전의를 없애는 것이 군사의 좋은 계책이고, 도망치는 죄인을 추격하듯 적을 축출하는 것이 군사의 훌륭한 방책이다.” 조돈은 이처럼 훈계하고 병기를 다듬게 하며 말에게 꼴을 먹이고 병사들을 배불리 먹여 야밤에 은밀히 군사를 일으켰다. 무자일(4월 초하루), 영호令狐(고수의 서쪽 30)에서 진의 군사를 물리쳤고 고수刳首(산서성 임의현臨猗縣 서쪽)까지 진격했다.

기축일(4 2), 선멸은 진나라로 망명했고 사회가 그를 따라갔다

공자옹의 영접을 위해 선멸이 진나라로 갈 때 순림보가 말렸다. “부인과 태자가 건재한데 밖에서 군주를 구하는 일은 필경 성공할 수 없습니다. 병을 핑계로 사양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화가 미칠 것입니다. 경을 대신해 대부를 보내는 것도 가능한데 왜 굳이 가려고 하십니까? 함께 관직에 있었던 사람은 동료입니다. 일찍이 우린 동료였으니 내 어찌 진심으로 말하지 않겠습니까?” 선멸이 그의 조언을 따르지 않자 순림보는 「판」(『시·대아』)의 세 번째 장을 읊어 만류했지만 역시 듣지 않았다

선멸이 망명하자 순백(순림보)은 그의 처자와 보물과 재산을 모두 진나라로 보내주며 말했다. “우리가 동료이기 때문이네.

사회는 진나라에 머물던 삼 년 동안 사백士伯(선멸)을 찾지 않았다. 그의 종자가 말했다. “나라를 떠나 망인이 되었는데 이곳에서 그를 만나지 않는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사계士季가 말했다. “내가 그와 같은 죄를 지었지만 그의 판단이 옳았다고 생각하지 않으니 봐서 무엇 하겠는가?” 사회는 귀국할 때까지 끝내 그를 보지 않았다. ( 6.13.2.)


원문

秦康公公子雍: 文公之入也無衛故有·之難.乃多與之徒衛.

穆嬴日抱太子以啼于朝: 先君何罪? 其嗣亦何罪? 舍適嗣不立而外求君將焉寘此?出朝, 則抱以適趙氏頓首於宣子, : 先君奉此子也而屬諸子, : 此子也才吾受子之賜; 不才吾唯子之怨.今君雖終言猶在耳而棄之若何?宣子與諸大夫皆患穆嬴且畏偪乃背先蔑而立靈公以禦. 箕鄭居守. 趙盾將中軍先克佐之; 荀林父佐上軍; 先蔑將下軍先都佐之. 步招戎津爲右. . 宣子: 我若受則賓也; 不受寇也. 旣不受矣而復緩師將生心. 先人有奪人之心軍之善謀也. 逐寇如追逃軍之善政也.訓卒, 利兵秣馬, 蓐食潛師夜起. 戊子師于令狐至于刳首.

己丑先蔑士會從之.

先蔑之使也荀林父止之, : 夫人·大子猶在而外求君此必不行. 子以疾辭 若何? 不然將及. 攝卿以往可也何必子? 同官爲寮吾嘗同寮敢不盡心乎?弗聽. 爲賦之三章又弗聽. 及亡荀伯盡送其帑及其器用財賄於: 爲同寮故也.

士會三年不見士伯. 其人曰: 能亡人於國不能見於此焉用之?士季: 吾與之同罪非義之也將何見焉?及歸遂不見.


관련 주석

戊子: 무자일은 4월 초하루이다.

人及人戰于令狐: 영호는 『좌전·희공24년』의 주석을 참조하라.

晉先蔑: 『공양』: “진의 선말(선멸) 군사를 거느리고 진으로 도망쳤다.” 멸과 말 동음으로 가차. 『춘추·은공원년』의 주석을 참조. “이사以師, 두 글자는 혹 『공양』에서 『전』의 “以師外也”로 인한 연문이 아닌가싶다. 『공양』의 『석문』은 “말은 『좌씨』에선 멸로 쓴다.”고 설명하지만 『좌씨』에 “이사” 두 글자가 없다는 언급은 없다. 즉 육덕명이 근거한 본에도 이 두 글자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의 무자일이 삭일이라면 당연히 “송공 왕신이 죽었다”는 기사 앞에 배치되어야 한다. 혹 당시에 영호에서의 전투가 삭일에 있지 않았던 것은 아닌가?

 

춘추좌전 지도 - 영호 전투


秦康公公子雍文公之入也無衛故有·之難.진 강공은 진 목공의 태자 앵이다그의 모친은 목희로서 진 헌공의 여식이고 진 문공과 혜공의 이복누이이다그러므로 진 문공은 진 강공의 외삼촌이 된다『시·진풍·위양』의 “내가 외숙을 배웅하여 위양에 이르렀네.”라는 시구는 강공이 문공을 배웅한 시인데 문공이 진나라로 들어갈 때의 모습을 그가 몸소 봤다여와 극의 난은 『좌전·희공24년』에 보인다.

乃多與之徒衛보병을 도라 한다도위란 호위하는 보졸이다이 상황은 전쟁을 하려는 것이 아니므로 전차를 동원하지 않았다.

穆嬴日抱太子以啼于朝『예기·상대기』의 “임종 시 상주는 울부짖고()형제는 곡 한다.”에 대해 정현은 “슬픔에는 차이가 있다만약 어린아이가 길에서 엄마를 잃게 되면 울부짖지 않겠는가?”라고 설명한다즉 제와 곡은 슬픔의 경중과 깊음의 차이가 있다「진세가」“태자의 모친 목영(『사기』는 목을 목으로 쓴다)이 태자를 포대기에 싸서 조정에서 크게 울부짖었다(號泣於朝).” 즉 호읍號泣으로 제를 해석한 것.

先君何罪其嗣亦何罪舍適嗣不立而外求君將焉寘此? 음과 뜻은 두다()와 같다여기서는 포대기에 있는 태자 이고 가리킨다.

出朝則抱以適趙氏頓首於宣子『예기·소의』의 “부인은 길사吉事라면 군주가 상을 내릴 때도 숙배肅拜한다상주가 되어서는 수배手拜 하지 않는다.”에 대해 정현은 “숙배란 고개를 숙여 하는 절이다수배란 손을 땅에 대어 절하는 것이다부인은 숙배를 원칙으로 하지만 흉사 중엔 수배를 한다상주가 되어서 수배를 하지 않는 까닭은 남편과 장자를 위해 고개만 숙이는 것이다.”고 설명한다이에 따르면 목영은 조돈에게 만약 상차喪次 따른다면 고개만 숙여 인사해야 하고길배吉拜 따른다면 숙배를 해야 하지 고개를 땅에 조아리는 돈수는 옳지 않다그래서 『소의』의 공영달의 『소』는 “『좌전』에서 목영이 조돈의 대문에서 고개를 땅에 조아린 것은 그렇게 하여 조돈의 도움을 얻고자 한 것이지 예의 올바름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先君奉此子也而屬諸子 음은 촉이고 위탁함의 뜻.


양공 사후 후계 분쟁


: 此子也才吾受子之賜; 不才吾唯子之怨.: 吾唯子之怨”은吾唯子是怨”와 같다. 용법으로 쓰였다. 이 말은 양공이 조돈에게 자신의 아들을 잘 이끌고 가르칠 수 있도록 부탁한 것.

今君雖終言猶在耳而棄之若何?宣子與諸大夫皆患穆嬴且畏偪: 「진세가」: “조돈과 여러 대부들이 모두 목영을 걱정하는 한편 해를 입을까 두려워했다.” “주”자로 “핍”을 해석하고 있다. 「조세가」: “조돈은 목영을 근심하는 한편 그의 일족과 대부들이 자신을 습격할 것을 걱정했다.”고 하여 그가 두려워한 것은 목영을 따르는 무리였다고 말한다. 『어람』146에서는 복건을 인용하여, “다른 공자들의 무리가 와서 핍박할 것을 걱정했다.”고 한다. 이이덕의 『집술』은 “다른 공자란 공자악 무리들을 가리킨다.”고 말한다고 하여 『사기』와는 뜻이 다르다.

乃背先蔑而立靈公以禦: 「진세가」: “이 때문에 맞이하러 간 이들을 배신하고 태자 이고를 세우니 이가 곧 영공이다. 그리고 군사를 내어 진이 보낸 공자옹의 무리를 막았다.『좌전』의 “선멸을 배신하고”는 실제로는 맞이하러 간 공자옹을 말한다. 선멸은 맞이하러 간 사신들의 우두머리였고 끝내 이 때문에 진나라로 망명했기 때문에 “선멸을 배신했다”고 말한 것이다. 이때 선멸은 이미 먼저 돌아와 있었기 때문에 하군의 장수로 있었다. 이전의 학자들은 “선멸을 배신했다”는 말과 뒤의 “선멸이 하군을 이끌고”라는 말이 서로 모순된다고 의심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箕鄭居守. 趙盾將中軍先克佐之: 두예: “선극은 선차거의 아들로서 호야고를 대신했다.

荀林父佐上軍: 상군의 장수는 기정인데 이미 도성의 수비를 맡았기 때문에 부장인 순림보가 홀로 지휘했다.

先蔑將下軍: 선멸은 이때 이미 진으로 먼저 돌아와 있었기 때문에 하군을 지휘할 수 있었다. 그가 하군을 지휘한 것은 상대의 핍박으로 인해 부득이했다. 그래서 영호의 전투 때 그 다음날 바로 진으로 망명했고 비록 하군을 지휘했지만 아마도 진의 군사들과 싸우지는 않았을 수는 있다. 『곡량전』: “전투를 그만두고 진나라로 망명했다. 군대에서 이탈한 것이다”, 『공양전』: “이 사람은 진의 선매先眛(선멸)이다. 왜 경문에서 ‘’이라고 말했는가? 폄하한 것이다. 왜 폄하했는가? 두 마음을 품었기 때문에 멀리한 것이다. 그를 멀리한 것은 왜인가? 군사를 인솔하여 도망갔기 때문이다.”모두 역시 선멸이 군대를 이끌었다고 말하고 있다. 우창의 『향초교서』는 “이 하군을 지휘한 이는 실제 선복이고 선멸이 아닌 것 같다. 문맥 상 선멸은 ‘복’자를 ‘멸’자로 잘못 쓴 것일 뿐이다.”라고 주장하지만 『곡양전』과 『공양전』으로 봐도 그렇지 않음을 충분히 알 수 있다.

先都佐之. 步招戎津爲右: 이 어융과 거우는 모두 중군 소속이다. 『좌전·민공2년』의 ‘호돌이 어융이 되고, 선우가 거우가 되었다.”는 기사에서는 태자 신생이 헌공을 대신해 상군의 어융과 거우를 거느렸다는 뜻이었다. 또 “양여자양이 한이罕夷 어융이 되고 선주목이 거우가 되었다.”는 말은 즉 한이가 하군의 장수였고, 양여자양과 주단목이 그의 어융과 거우로 출전했다는 뜻이다. 『좌전·희공8년』의 “진의 이극이 군사를 이끌고 양유미와 괵역이 각각 어융과 거우가 되었다.”는 것은 두 사람이 이극의 수하로 출전한 것이다. 『좌전·문공11년』의 “후숙하가 장숙의 어융으로 면방생이 거우로 출전했다.”는 것은 두 사람이 숙손득신의 수하로 출전한 것이다. 『좌전·문공11년』의 “조돈이 중군을 지휘하고 범무휼이 어융이 되었다.”는 말은 조돈의 수하로 출전한 것이다. 즉 이런 예들로 보면 어융과 거우가 반드시 군주의 수하로 출전하는 것은 아니다. 두예는 어와 우를 모두 군주의 그것으로 오해하여 “진나라는 옹을 영접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가 돌연히 그 계획을 바꿔 영공을 세웠고 이런 까닭에 거우와 융어를 그대로 그 직에 둔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는 『좌전』에서 분명히 “선멸을 배신하고 영공을 세웠고, 옹을 호위하여 오고 있는 진의 군사를 막았다.”는 말을 인식하지 못했다. 즉 영공을 세운 것이 먼저이고, 그후 군사를 일으켰고 이 군사는 오로지 진나라 군사를 막기 위한 것으로서 그가 말한 것처럼 “돌연히 계획을 바꾼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어융과 거우는 진 군주의 어와 융이 아님을 충분히 알 수 있다.

: 의 음은 근 혹은 근이다. 근음은 진나라 땅으로 현재 산서성 임의현臨猗縣 동쪽이고 영호와는 그리 멀지 않다.

宣子: 我若受則賓也: 호위해온 공자옹을 받아들인다면 당연히 진나라 군사를 빈례로써 맞이해야 한다.

不受寇也: 하지만 공자옹을 거절해야 한다면 진나라 군사는 적이다.

旣不受矣而復緩師將生心: 생심이란 무력으로 공자옹을 진나라로 들이려 할 것이란 뜻.

先人有奪人之心: 선인은 주도권을 갖는다는 뜻. 주도권을 가지고 적의 전의를 잃게 만든다는 뜻.

軍之善謀也. 逐寇如追逃軍之善政也.: 유문기의 『구주소증』: “‘先人有奪人之心’과 ‘逐寇如追逃’는 고대 『군지軍志』의 말이다.

訓卒: 『좌전·성공18년』에선 “訓卒乘”이라고 말하는데 여기 본문에선 승을 언급하진 않았지만 역시 군대에 전차 부대가 있다. 즉 전투에 앞서 병사들에게 훈계를 함이다.

利兵: 이병은 즉 『좌전·희공33년』의 여병厲兵과 같은데, 연마하는 것을 려 하고, 예리하게 다듬는 것은 리라 한다. 연마는 방법이고 예리함은 그 결과일뿐 같은 말이다. 혹자는 “고대에 려와 리는 통한다”라고 설명했지만 반드시 그렇다고 볼 수는 없다.

秣馬, 蓐食: 『방언』: “욕은 두터움이다(, 厚也).” 욕식蓐食 배불리 먹다. 전투에 앞서 병사를 배불리 먹인다. 『상군서·병수편』: “장정으로 구성된 군대는 잘 먹여 사기를 높인 후 진을 펼쳐 적을 대적하게 한다. 여인으로 구성된 군대는 잘 먹이고 보루를 지키게 하며 명령을 기다리게 한다.” 『사기·항우본기』: “항우가 크게 노하여 말하였다. ‘아침에 병사들을 배불리 먹이라. 그리고 유방의 군사를 격파하게 할 것이다.’” 홍량길의 『좌전고』와 유문기의 『구주소증』에선 모두 욕식을 야식 혹은 조식이라고 풀이했지만 옳지 않은듯하다. 여기서는 왕념손의 『광아소증』과 왕인지의 『술문』의 설명을 따랐다.

潛師夜起. 戊子師于令狐至于刳首: 『수경·속수주』에서 궐인 주장을 인용하여 “영호는 의씨이고, 고수와는 서쪽으로 30리 떨어져 있다.”고 한다. 즉 고수刳首는 황하의 동쪽 진나라 변경에 해당하여, 현재의 임의현臨猗縣 서쪽 45리 떨어진 임진현의 폐치이다. 『청일통지』는 현재 섬서성 합양현合陽縣 동남쪽이라고 설명했지만 옳지 않은 것 같다. 아마 진나라의 군사가 황하를 건너 도망치기 전에 격파하려 했을 것이다. 또 후한시대 『위경후비』에 새겨진 글을 보면 “성은 해량, 땅은 과수이다. 산은 신령을 모시기에 충분하고 계곡은 기구에 견줄만하다(城惟解梁, 地卽郀首. 山對靈足, 谷黨猗口).”라는 말이 있다. 고수郀首 곧 본문의 고수이며 합양에 있지 않다.

己丑: 4 2일이다.

先蔑士會從之: 두예: “고수에서 도망친 것이다.” 즉 이를 보면 선멸은 본래 군중에 있었다가 진나라 군사가 패하자 도망친 것이지 선멸이 진 군사를 맞이해 방어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先蔑之使也荀林父止之, : 夫人·大子猶在而外求君此必不行. 子以疾辭 若何? 不然將及: 두예: “화가 미칠 것이다.

攝卿以往: 『좌전·은공원년』의 “경문에서 즉위라고 쓰지 않은 까닭은 그가 섭정이었기 때문이다(不書卽位攝也), 『좌전·희공28년』의 “사회가 대신 도왔다(士會攝右).”에서의 섭은 대리하다의 뜻과 같다. 섭경이란 대부를 보내 경의 임무를 대신하게 하는 것.

可也何必子? 同官爲寮吾嘗同寮: 희공 28년에 순림보가 중군을, 선멸이 좌군을 지휘했기 때문에 동료라고 말했다.

敢不盡心乎?弗聽. 爲賦之三章: 「판」은 현재 『시·대아』의 편이다. 그 세번째 장은 “내가 비록 하는 일은 다르나 너와 더불어 동료로다. 내 너에게 계책을 세워주는데도 내 말을 건성으로 듣는구나. 내 말은 오직 급한 일이 있어서이니 웃어넘기지 말라. 선현이 말씀하시되 나무꾼에게도 물어야 한다 하니라”인데, 동료와 타인을 위해 계책을 일러주는 내용을 취하여 자신을 말을 따르는 것이 좋음을 말한 것이다.

又弗聽. 及亡荀伯盡送其帑及其器用財賄於: 爲同寮故也.: 주석 없음.

士會三年不見士伯: 사백은 곧 선멸이다.

其人曰: 사회의 종자를 말한다.

能亡人於國: 두예: “선멸과 함께 도망하였다는 뜻이다.

不能見於此焉用之?: 두예: “왜 이처럼 행동하십니까?

士季: 吾與之同罪: 두예: “함께 공자옹을 영접한 죄이다.

非義之也將何見焉?: 사회는 원래 선멸의 사람됨을 좋지 않게 봤다.

及歸遂不見: 사회는 문공 13년에 귀국한다. 『좌전』에서 뒷날의 일을 서술한 것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