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 장왕, 하징서를 주살하다 (춘추좌전.7.11.5)

겨울, 초 장왕이 진의 하씨의 난( 7.10.4.)을 빌미로 진나라를 정벌했다

장왕이 진나라 사람들에게 말했다. “동요치 말라! 소서씨少西氏(하징서)를 토벌할 것이다.” 이어 도성으로 들어가 하징서夏徵舒를 주살했는데 율문栗門에서 거열형에 처했다. 장왕은 진을 초나라의 현으로 삼았다. 이때 진 성공은 진에 머무르고 있었다

신숙시申叔時가 제나라로 사절을 갔다가 돌아와 장왕에게 복명한 후 물러났다. 장왕이 사람을 보내 그를 책망했다. “하징서가 무도하여 그의 군주를 시해했기에 과인이 제후들을 거느리고 그를 토벌하고 주살하니, 제후들과 현공들이 모두 과인의 행동을 축하했건만 유독 너는 과인을 칭찬하지 않았다. 무슨 까닭인가?” 

“변명을 해도 되겠습니까?” 신숙시가 말했다

“좋다!” “하징서는 그의 군주를 시해했으니 그 죄는 매우 큽니다. 그를 토벌하여 주살하신 일은 군주께서 의로운 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허나 세간에 이런 말도 있습니다. ‘소를 끌고 남의 밭을 가로질렀더니 밭주인이 그의 소를 빼앗는구나.소를 끌고 남의 밭을 지름길 삼는 것은 실로 죄가 있으나 그렇다고 소를 빼앗는 것은 지나친 처사입니다. 제후들이 왕을 따라나선 것은 죄인을 토벌한다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을 초의 현으로 삼은 것은 그 나라의 재화를 탐낸 것입니다. 토벌을 명분으로 제후들을 소집하여 탐욕으로 귀결하니 불가하지 않겠습니까?” 신숙시가 말했다

“옳다! 내가 그 같은 충고를 듣지 못하였다. 되돌려주면 되겠는가?” 장왕이 말했다

“우리 소인들은 소위 ‘남의 품에서 빼앗은 물건은 그에게 돌려준다.’고 말하곤 합니다.” 장왕은 곧바로 진나라를 다시 세워주었다. 진의 각 향에서 한 명씩 취하여 데려와 거주하게 하고 그곳을 하주夏州(호북성 무한시의 한양의 북쪽)라고 불렀다. 그러므로 『춘추』에 “초 장왕이 진나라로 쳐들어갔다. 공손녕과 의행보를 진나라로 들여보냈다.”라고 썼는데 그의 행동에 예가 있었음을 기록한 것이다.


원문

楚子陳夏氏亂故. 無動! 將討於少西氏.遂入夏徵舒轘諸栗門. . 陳侯.

申叔時使於, 復命而退. 王使讓之曰: 夏徵舒爲不道其君寡人以諸侯討而戮之諸侯·縣公皆慶寡人女獨不慶寡人何故?對曰: 猶可辭乎?王曰: 可哉!: 夏徵舒其君其罪大矣; 討而戮之君之義也. 抑人亦有言曰: 牽牛以蹊人之田而奪之牛’,牽牛以蹊者信有罪矣; 而奪之牛罰已重矣. 諸侯之從也. 曰討有罪也. 今縣貪其富也. 以討召諸侯而以貪歸之無乃不可乎?王曰: 善哉! 吾未之聞也反之可乎?對曰: 吾儕小人所謂取諸其懷而與之. 乃復封. 取一人焉以歸謂之夏州. 故書曰楚子. 公孫寧·儀行父, 書有禮也.


관련 주석

楚子陳夏氏亂故: 두예: (선공10) 하징서가 군주를 시해했다.” 그런데 그 당시 여름 초 장왕은 오히려 하징서를 진의 군주로 인정하고 그와 동맹을 맺은 적이 있다. 즉 올해 겨울 하징서를 토벌한 까닭은 비단 그가 영공을 죽인 것만이 이유는 아니다. 어떤 이는 하징서가 영공을 시해하고 스스로 군주의 자리에 올랐지만 진나라에 필시 이에 불복하고, 반란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한 자가 있었기 때문에 초나라 역시 이런 이를 토벌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無動!: 놀람驚懼이다. 『좌전·소공18년』의 “앞으로 큰 상서로운 조짐이 있을 것이니 백성들은 이에 놀라게 될 것이다(將有大祥, 民震動).”에서 진동은 크게 놀람震驚과 유사하다. 「진세가」는 “진나라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놀라지 말라(無驚)!’”고 썼는데, 즉 “경”자로 “동”을 해석한 것으로서 입증할 수 있다. 『맹자·진심하』에서 무왕이 은나라를 칠 때 “무왕이 말하였다. ‘놀라지 말라(無畏)! 너희를 편케하려는 것이지 백성을 적으로 삼으려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뜻이 이와 비슷하다. 왕인지의 『술문』에 설명이 자세하다.

將討於少西氏.: 소서씨는 곧 하징서이다. 징서의 조부의 자가 자하子夏이고 이름이 소서이다. 그래서 “소서씨”라고 말했다. 「진세가」: “초 장왕이 하징서를 영공을 시해한 죄를 들어 제후를 이끌고 진나라를 토벌했다. 진나라에 사람들에게 ‘두려워 말라! 우리는 징서를 주살할 뿐이다.’라고 말했다.” “징서를 주살함”과 본문의 “소서씨를 토벌함”은 같은 뜻이다.

遂入夏徵舒轘諸栗門: 대해선 『좌전·환공18년』을 참조. 율문은 진의 성문이다.

因縣: 두예: “진을 멸하고 진나라를 초의 현으로 삼았다.” 아래 “제후들과 현의 수장들이 모두 과인의 공을 축하했다”는 말을 보면, 초나라는 이미 이전에도 현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초세가」: 16년 진나라를 토벌하고 하징서를 죽였다. 징서는 그의 군주를 시해했기 때문에 주살했다. 진을 멸한 후 현으로 삼았다.” 『회남자·인간훈』: “진의 하징서가 군주를 시해했고 초 장왕이 그를 토벌했다. 진나라는 장왕의 명을 받들었다. 장왕은 그의 죄를 토벌한 후 군사를 보내 진나라를 수비하게 했다.” 여기서 “遣卒戍”이 곧 진을 멸하고 그 영토를 취했다는 말이다.

陳侯: 진후는 이때 진나라에 머물고 있었다. 진후는 곧 영공의 태자 오이며 진 성공을 말한다. 그가 진나라로 망명한 사건은 『춘추』와 『좌전』엔 보이지 않는다. 「진세가」는 징서가 영공을 시해했던 사건과 관련지어 공녕과 의행보가 초나라로 망명한 것은 선공 10년의 여름의 일로 보고 있다. 『좌전·양공25년』에 정나라 자산은 “하(징서)씨의 반란때 성공이 망명하여 우리나라를 거쳐 진나라로 갔다.”고 말하고 있다. 성공은 정나라를 통해 진으로 망명했다.

申叔時使於: 「진세가」『집해』에서 가규의 주장을 인용하여, “숙시는 초나라 대부”라고 말한다.

復命而退. 王使讓之曰: 夏徵舒爲不道其君寡人以諸侯討而戮之: 공영달의 『소』: “『춘추』에는 ‘제후’가 없는데, ‘제후를 이끌고 토벌했다’고 말하는 것은 당시 초나라의 속국들이 종군한 것이다. 12년 필의 전투에서 『춘추』는 ‘당’을 언급하지 않았지만 『좌전』은 ‘당후가 좌거가 되어’라고 기록한다. 또 소공 17년 장안의 전투에서 『춘추』는 ‘수’를 언급하지 않았지만 『좌전』은 ‘수나라 사람을 시켜 배를 수비하게 했다’고 적고 있다. 이를 보면 이때에도 역시 제후들이 종군했지만 초나라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언급하지 않은 것뿐이다.”라고 말한다. 「진세가」: “제후들을 이끌고 진을 토벌했다.

諸侯·縣公皆慶寡人: 두예: “초나라는 현의 대부를 모두 ‘공’이라 불렀다.” 왕인지의 『술문』: “현공은 현윤과 같다. 공후 등의 공과는 다르다. 만약 초나라가 왕을 참칭했기 때문에 그의 신하들 역시 공으로 참칭한 것이라고 한다면, 즉 초나라의 관리 중 영윤과 사마보다 높은 이가 없는데, 어떻게 영윤과 사마는 공이라 부르지 않고 공이라고 호칭된 이들은 모두 현대부인가? 『좌전·양공25년』의 ‘제 상공의 처는 동곽언의 누이이다’에 대해 두예는 ‘상공은 제 상읍의 대부이다’라고 설명한다. 제의 현대부 역시 공이라고 칭한 것으로 즉 공은 현대부를 가리키는 통칭이지 공후를 참칭한 것은 아니다.” 그의 주장이 옳다.

女獨不慶寡人何故?: 「초세가」, 「진세가」 그리고 『회남자·인간훈』에서 모두 이 일화를 기재하고 있다.

對曰: 猶可辭乎?: 변명함()자에 대해선 『좌전·희공4년』의 주석을 참조.

王曰: 可哉!: 夏徵舒其君其罪大矣; 討而戮之君之義也. 抑人亦有言曰: 은 가벼운 반전을 표시하는 말. 요즘말로 “不過”와 같다.

牽牛以蹊人之田: 의 음은 계이고 지름길의 뜻. 여기서는 동사로 쓰였고 즉 소를 끌고 다른 사람의 밭을 가로질러 가는 것을 첩경이라고 생각함이다.

而奪之牛: 금택문고본은 “而田主奪之牛”라고 쓴다. “전주”라는 두 글자가 더 있다. 「진세가」: “세간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소를 끌고 다른 사람의 밭으로 가로질러 가면 그 밭의 주인이 소를 빼앗는다(牽牛徑人田, 田主奪之牛).” 「초세가」역시 대략 같아서 “田主取其牛”라고 쓴다. 『회남자·인간훈』역시 “소를 끌고 다른 사람의 밭을 가로질러 가면 밭 주인이 그를 죽이고 소를 빼앗는다(牽牛蹊人之田, 田主殺其人而奪之牛)”라고 쓰고 있는데, 殺其人”을 덧붙인 것 외에는 모두 “田主奪之牛”라고 쓴다. 『좌전』에도 “전주”라는 두 글자가 있는 것이 옳은듯하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좌씨』의 문체는 간결하여 두 글자를 빼도 충분히 알 수 있기 때문에 두 글자가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탈지우는 그의 소를 빼앗는 것이다.

牽牛以蹊者信有罪矣; 而奪之牛罰已重矣: .

諸侯之從也: 금택문고본에선 “초나라를 따라서()”로 썼는데, 옮겨쓰는 이가 뜻을 보충한 것 같다.

曰討有罪也. 今縣貪其富也. 以討召諸侯而以貪歸之: 일을 매듭지다()와 유사하다.

無乃不可乎?: 「초세가」, 「진세가」 그리고 『회남자·인간훈』의 문장 역시 대략 이와 같다.

王曰: 善哉! 吾未之聞也: 유문기의 『소증』: “미지문은 초나라 신하 중 이렇게 간언을 올린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反之可乎?對曰: 吾儕小人所謂取諸其懷而與之,”: 두예: “숙시는 소인의 생각은 얕다고 겸손하게 말하면서 비유하길 다른 사람의 품에서 빼앗은 물건을 돌려주는 것이 돌려주지 않는 것보다 낫다고 말했다.” 오제소인吾儕小人 당시의 상투어이다. 양공 17년과 30년의 『좌전』에도 보인다. 『좌전·소공원년』의 “吾儕偸食, 『좌전·소공24년』의 “吾儕何知焉”에서도吾儕”를 함께 쓴다. “오제”는 요즘의 “우리들(我們這一班)”과 유사하고 여러 사람이란 뜻만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자세한 것은 『문언어법』을 참조하라.

乃復封: 「진세가」: “장왕은 ‘그대의 말이 옳다.’라 하고, 진 영공의 태자 오를 진에서 맞이하여 세웠다. 진의 군주를 회복시켰으니 그가 성공이다.” 「초세가」: “장왕이 이 때문에 진나라를 다시 회복시켰다.” 『회남자·인간훈』: “장왕은 ‘그대의 말이 옳다.’라고 하고 이에 진을 수비하던 군사를 파하고 진나라의 후사를 세웠다. 제후가 이 소식을 전해듣고 모두 초나라를 예방했다.

取一人焉以歸謂之夏州: 유문기의 『소증』: “초나라가 아마 진나라의 백성들을 각 향에서 한 명씩 포로로 잡아 초나라 땅에 별도로 하주라는 곳을 세워 그 무공을 자랑한 것이다.” 강영의 『고실』: “하주는 장강과 한수의 합류하는 지점의 북쪽으로 보인다. 그 뒤로 한수에 하라는 명칭이 생기게 되었다.” 『청일통지』에 따르면, 하주는 대체로 현 호북성 무한시의 한양의 북쪽이다.

故書曰楚子. 公孫寧·儀行父, 書有禮也: 「진세가」역시 이 일화를 기재했는데 그 말미에, “공자가 역사를 읽다가 초나라가 진을 다시 회복시킨 지점에 이르러서는 ‘현명하구나! 초 장왕이여! 천승의 나라를 가벼이 여기고 오히려 신하의 한 마디를 무겁게 여겼다.’”라고 적고 있다. 『공자가어·호생편』에서도 역시 “공자가 역사를 읽다가 초가 진을 회복시킨 곳에 이르러서 감탄하며, ‘초 장왕은 현명하다! 천승의 나라를 한 마디 말보다 가벼이 여기었다. 숙신의 간언이 아니었다면 그 의리를 깨닫지 못했을 것이고; 장왕의 현명함이 아니었다면 그의 가르침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전한다. 장왕이 진을 초의 현으로 병탄하지 않고 복권시킨 일은 공구의 “멸망한 나라를 다시 일으키고 끊어진 세계世系 다시 잇는다(『논어·요왈편』)”라는 말과도 부합한다. 그래서 『좌씨전』은 그의 행동을 “예에 맞았다”고 쓴 것이다. 그러나 공손녕과 의행보를 다시 들여보낸 일은 “예에 부합한”일은 아니다. 후대인들이 이에 대해 의문을 품고 논한 자가 있지만 고사考史 해당하지 않기 때문에 채록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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