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 장왕, 진陳나라를 침략하다 (춘추좌전.7.1.8)
기원전 611년, 송나라에서 소공을 시해했다. (☞ 공자포의 반란) (기원전 610년) 진晉의 순림보가 제후들의 군대를 거느리고 송나라를 정벌하자 송나라는 진나라와 화친하고 송 문공은 진나라와의 동맹을 수용했다. 다시 호扈에서 제후들과 회합하여 노나라를 위해 제나라를 토벌하려다 모두 뇌물을 받고 군사를 돌렸다. (☞ 뇌물을 받고 퇴각) 정 목공이 말했다. “진은 함께할 만한 나라가 아니다.” 이어 초나라의 동맹을 받아들였다. (614년) 진陳 공공이 타계했을 때 초나라는 조문하지 않았다. 진陳 영공은 진晉과의 결맹을 수용했다.
가을, 초 장왕이 진陳을 침략하고 이어 송을 침략했다. 진晉의 조돈이 군사를 거느리고 진과 송을 구원했다. 조돈이 (송 문공, 진 영공, 위 성공, 조 문공 등과) 비림棐林(하남성 신정현新鄭縣의 북쪽)에서 회합하고 정나라를 정벌했다. 초나라의 위가蒍賈가 정나라 구원에 나섰고 북림北林(하남성 정주시鄭州市의 동남쪽)에서 연합군과 마주쳐 해양解揚을 사로잡았다. 진晉은 곧 군사를 돌렸다.
원문
宋人之弒昭公也,晉荀林父以諸侯之師伐宋,宋及晉平,宋文公受盟于晉. 又會諸侯于扈,將爲魯討齊,皆取賂而還. 鄭穆公曰: “晉不足與也.” 遂受盟于楚. 陳共公之卒,楚人不禮焉. 陳靈公受盟于晉.
秋,楚子侵陳,遂侵宋. 晉趙盾帥師救陳·宋. 會于棐林,以伐鄭也. 楚蔿賈救鄭,遇于北林,囚晉解揚. 晉人乃還.
관련 주석
▣宋人之弒昭公也: 문공 16년의 일이다.
▣晉荀林父以諸侯之師伐宋: 문공 17년의 일이다.
▣宋及晉平,宋文公受盟于晉: 『좌전·문공17년』: “도리어
문공의 지위를 인정하고 돌아왔다.” 본문에서 말하는 맹약이다.
▣又會諸侯于扈,將爲魯討齊: 문공 15년의 일이다. 문공
17년의 사건을 말하고 뒤에 15년의 일을 언급한 까닭은
송의 문제가 핵심이기 때문이다.
▣皆取賂而還: 『좌전』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다. 송에게서 뇌물을 받은 일은
당시의 『좌전』에 기록되어 있진 않았지만 여기서 보충설명을 하고 있다.
▣鄭穆公曰: “晉不足與也.” 遂受盟于楚. 陳共公之卒: 공공은 문공 13년에 사망했다.
▣楚人不禮焉: 불례란 초나라에서 진 공공의 장례에 참석하지 않은 일을 말한다.
▣陳靈公受盟于晉: 주석 없음.
▣秋,楚子侵陳,遂侵宋: 「년표」: “초 장왕 6년 송과 진을 정벌했다. 우리 초나라를 배반하고 진에 복종했기 때문이다.”
▣晉趙盾帥師救陳·宋: 장총함의 『두주변증』은 『춘추』에 “송”자가 없기 때문에 “송”자는 아랫글에 이어야 한다. 즉 “宋會于棐林”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이나 전혀 신뢰할 수 없다. 초가 진과 송을 정벌했기 때문에 진이 두 나라의 구원에 나섰었다. 또
비림에서 회합한 나라는 모두 네 나라로서 어떻게 “송”하나만 따로 볼 수 있는가? 「년표」: “진 영공 13년 조돈이 진과 송의 구원에 나섰다.” 사마천 역시 진과 송을 한 구로 해석했다.
▣會于棐林,以伐鄭也. 楚蔿賈救鄭: 위가는 희공 27년과 문공 16년의
『좌전』에 언급되었었고, 『좌전·선공4년』에도 보인다.
▣遇于北林: 북림北林은 정나라 땅이다. 현 하남성 정주시鄭州市의 동남쪽, 신정현의 북쪽이다.
▣囚晉解揚: 해양은 『좌전·문공8년』에 이미 언급되었다. 『좌전·선공15년』에 근거하면, 해양은
후에 진나라로 다시 돌아갔다.
▣晉人乃還: 주석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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