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 목공의 서융西戎 제패 (춘추좌전.6.3.4)

목공이 진을 정벌하여 황하를 건넌 후 타고 온 배를 불살랐다. 왕관王官(산서성 문희현聞喜縣 서쪽) 땅을 빼앗고 교에 이르렀지만 진나라 군사는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어 진은 모진茅津(산서성 평륙현平陸縣 모진도茅津渡)에서 도강하여 효산에서 전사한 시신을 수습하고 흙더미를 쌓아 기념한 후 돌아갔다. 이어 서융西戎을 제패했는데 맹명을 중용했기 때문이다

군자는 이를 통해 “진 목공이 군주다움을 알 수 있다. 인재를 등용할 때는 널리 살피고 일단 쓰면 한결같이 신임했다. 맹명孟明은 신하로서 나태하지 않았고 두려워할 줄 알고 사려 깊었다. 자상子桑은 충성스러워 인재를 알아보고 선한 사람을 천거할 줄 알았다. 채번」(『시·소남』)에 ‘어디서 흰쑥을 캘 수 있을까? 연못가와 웅덩이지. 어디에 흰쑥을 쓸까? 공후의 제사라네.’라고 말했는데 목공에게 이런 면모가 있었다. 또 「증민」(『시·대아』)에 ‘밤낮으로 나태하지 않고 한 사람을 섬기네.’라는 시구가 있는데 맹명에게 이런 면모가 있었다. 「문왕유성」(『시·대아』)에 ‘후대에 현자를 남겨 그들을 편안히 보좌하게 하네.’라고 말하였으니 자상에게 이런 면모가 있었다.


원문

秦伯焚舟王官人不出. 遂自茅津尸而還. 遂霸西戎孟明.

君子是以秦穆[1]之爲君也人之周也與人之壹也; 孟明之臣也其不解也能懼思也; 子桑之忠也其知人也善也. : 于以采蘩? 于沼·于沚. 于以用之? 公侯之事 秦穆有焉. 夙夜匪解以事一人’,孟明有焉. 厥孫謀以燕翼子’,子桑有焉.



[1] 완각본에선 “秦穆公”으로 쓰고 있어 “공” 한 글자가 더 있다. 여기서는 『교감기』와 왕인지의 『술문』, 그리고 『당석경』, 금택문고본, 족리본에 근거하여 삭제했다.


관련 주석

秦伯焚舟: 항우의 거록 전쟁과 같다. 배를 침몰시키고 솥을 부셔서 필승의 결의를 보인 것이다.

王官: 「진본기」는 “왕관과 호 땅을 취했다.”라고 말했다. 교와 호는 고음이 같아 통가할 수 있다. 하지만 사마천이 교를 지명으로 인식하여 왕관의 부근 어느 지역으로 생각했을 수도 있다. 이 호는 『좌전·선공12년』의 “진나라 군사가 오와 호의 중간 지역에 주둔했다”, 『좌전·애공4년』의 “제나라의 국하가 진을 정벌하고 호 땅을 취했다.”에서의 호와는 별개의 지역이다. 염약거는 『사서석지우속四書釋地又續』에서 교는 원교/근교의 교이며, 소공 23년의 진이 교를 포위했다에서 교는 주나라 교외를 말하며; 정공 12, 위나라가 조나라를 정벌하여 근교에서 승리했다는 기사에서 교는 조나라 근교이고; 애공 11년 제나라와 교에서 전투를 벌였다는 기사의 교는 노나라 근교로서 이 교들의 의미는 모두 같다. 그러므로 본문은 “왕관 지역을 취했다”를 한구로 보고, 진 군사가 왕관 지역을 쳐서 빼앗은 뜻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그는 “급교”를 한 구로 보고, 진의 병사들이 진의 도성 강성의 교외까지 도달한 것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다음 기사에서 진의 군사들이 진을 정벌할 때, 먼저 서쪽에서 황하를 건너 동쪽으로 진출하여 왕관 지역을 빼앗고 다시 북쪽으로부터 남쪽으로 향해 모진에서 황하를 건너고 있다. 만약 염약거의 주장처럼 왕관을 빼앗고 진의 도성 근처까지 진출했다면 북쪽에서 남쪽으로 내려오기 전에 먼저 동북쪽으로 백 수십 리를 간 연후에 다시 돌아서 남쪽으로 와야 하므로 당시의 행군 진로로 보면 취할 수가 없다. 왕관은 성공 13년 여상呂相과의 관계를 끊을 때 보낸 외교문서를 보면, “우리나라 속천을 정벌하고 왕관 땅의 백성들을 사로잡아 갔으며(伐我涑川, 俘我王官)”이라고 말한 것에 근거하면, 속수涑水 근처에 있어야 맞다. 『수경·속수주涑水注』에서 “속수는 다시 서쪽으로 흘러 왕관성의 북쪽을 지난다.”고 말한 것이 이것이다. 현재의 산서성 문희현聞喜縣 서쪽에 위치해야 옳다. 혹자는 섬서성 징성현澄城縣 왕관이 이곳이라고 하는데 옳지 않다.

춘추좌전 지도 - 양진


人不出: 작년 조최의 충고를 따른 것.

遂自茅津: 모진은 현재의 산서성 평륙현平陸縣 모진도茅津渡이다. 대양도大陽渡라고도 말한다. 모진의 건너편은 하남성 섬현인데 황하를 건너 동쪽으로 진출하여 효산에 도달했다.

尸而還: 두예는 봉(과거 효산에서 죽은 병사들의) 시신을 거두어 매장했다”고 풀이한다. 「진본기」의 『집해』에선 가규의 설을 인용하여 “흙을 쌓아 그 장소를 표시한 것(封識之)”이라고 한다. 유문기의 『소증』은 주준성의 주장을 인용하여 “효에서 패한 것은 희공 33 4월이었고, 봉시한 것은 문공 3 5월이므로 3년의 시간이 흘렀다. 매장할 시신이 남아 있었을까? 그저 그 땅을 표시해 놓은 것일 뿐이다. 가규의 주장이 옳고 두예가 틀렸다.”고 말한다. 주준성의 주장이 옳다. 「진본기」는 “36, 목공은 맹명을 더욱 중용하였고 진을 정벌하게 하였다. 황하를 건너 타고 왔던 배를 불사르고 진나라를 크게 패퇴시켰다. 왕관과 호 지역을 빼앗아 효산의 패배를 보복했다. 진나라는 성을 수비할 뿐 감히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때 목공은 몸소 모진에서 황하를 건너 효산에서 봉시하고 발상하였으며 사흘간 곡하였다.”고 전한다. 진의 군사를 크게 패퇴시켰다는 내용은 『좌전』과는 다르다. 『좌전』에선 “진나라 군사들은 성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어서 교전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遂霸西戎: 「진본기」: “목공 37, 진은 유여모由余謀 장수로 삼아 융왕戎王 정벌하고 12개 나라를 새로 얻었으며 천 리의 땅을 새로 개척하여 드디어 서융을 제패했다.

孟明: 주석 없음.

君子是以秦穆之爲君也: 완각본에선 “秦穆公”으로 쓰고 있어 “공” 한 글자가 불필요하게 더 있다. 여기서는 『교감기』와 왕인지의 『술문』, 그리고 『당석경』, 금택문고본, 족리본에 근거하여 삭제했다.

人之周也: 두예: “주 잘 준비되다()이다. 그 사람의 나쁜 점에 편향되어 장점까지 버리지 않았다.” 「진본기」: “군자가 이 부분을 보고, 눈물을 떨구며 말했다. ‘아, 진 목공의 용인술이 매우 훌륭하도다!’”

人之壹也: 두예: “일은 두 마음이 없는 것이다(, 無二心).”즉 등용한 사람을 신임하여 한두 번의 패배에 내치지 않았다.

孟明之臣也: 신하된 자의 마음을 다했다는 뜻.

其不解也: 나태함 같다. 아래 “밤낮으로 부지런했다(夙夜匪解)”역시 같다.

能懼思也: 懼思 작년 조최가 진을 평가했던 “처신을 삼가며 더욱 덕을 베풀었다”, “훌륭했던 선조를 유념하며 그 덕을 닦았다.”는 뜻과 같다. 즉 전쟁에 패한 후에도 처신을 삼가며 백성들에게 덕을 베풀 것을 생각하고 조상의 덕을 유념하여 백성들에게 더욱 덕을 베풀었다는 의미.

子桑之忠也: 자상은 공손지이다. 『좌전·희공13년』에 관련 기사가 있다.

其知人也善也: 두예는 자상을 맹명을 천거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여씨춘추·신인편愼人篇』과 『한비자·설림상說林上』에 근거하면, 자상은 백리해를 천거한 사람이고 맹명은 백리해의 아들이다. 장병린은 『좌전독』에서 “한 번의 천거로 두 대에 걸친 현자를 얻었다. 그러므로 『좌전』에서 맹명의 성공 역시 자상에게 돌린 것”이라고 설명한다.

: 于以采蘩?: 우이于以于何로서 “어디서”의 뜻이다. 양수달 선생의 『적미거소학금석논총·시의 우이채번의 해석(詩于以采蘩解)』에 자세한 설명이 있다.

于沼·于沚. 于以用之? 公侯之事: 『시·소남·채번采蘩』의 시구이다. 『좌전·은공3년』의 “「풍」의 「채번采蘩」과 「채빈采蘋, 「아」의 「행위行葦」와 「형작泂酌」등의 시는 모두 충과 신을 밝힌 노래이다.. 본문에서 인용한 시구 역시 즉 진 목공이 충과 신으로 사람을 대하자 신하 역시 그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秦穆有焉. 夙夜匪解以事一人: 『시·대아·증민烝民』의 시구이다. 본래 시에서 말하는 일인은 주 선왕을 가리킨다. 이를 빌어 진 목공을 비유했다.

孟明有焉. 厥孫謀以燕翼子: 『시·대아·문왕유성文王有聲』의 시구이다. 의 뜻으로 자손들에게 지혜/모략을 남겨 줌이다. 은 안의 뜻이고, 은 돕다/보좌하다의 뜻이다. 즉 자손을 편안하게 보좌함이다. 『후한서·반표전班彪傳』에서 이 시를 인용하여, 현명한 신하를 얻어 보좌하게 하여 자손을 위해 일하도록 한다는 뜻이다. 자상이 백리해 부자를 천거하여 진 목공을 위해 보좌하게 한 것과 서로 부합된다. 진환의 『모시전소』에 자세하다.

子桑有焉: 『사기·진본기』는 또 「진서」를 인용하였는데 『좌전』에는 없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