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 장왕과 신주申舟, 길을 빌리는 예 (춘추좌전.7.14.3.)

초 장왕이 신주申舟에게 제나라를 예방하게 하고, 가는 길에 “송나라에 길을 빌리는 예를 취하지 말라.”고 말했다. 또 공자풍公子馮에게 진나라를 예방하게 하며, 역시 정나라에 길을 빌리는 예를 취하지 않게 했다

신주는 맹저孟諸에서 송에게 악행을 저지른 적이 있었기 때문에 아뢰었다. ( 6.10.5.) “정나라는 사리에 밝지만 송나라는 그렇지 않습니다. 진나라로 가는 사신은 탈이 없겠지만 저는 필경 죽을 것입니다.” 장왕이 말했다. “너를 죽이면 내가 송나라를 칠 것이다.” 신주는 아들 서를 장왕에게 알현시킨 후 사신 길을 떠났다

송나라 땅에 이르자 송인이 그를 제지하였다. 화원華元이 말했다. “우리나라를 지나며 길을 빌리는 예를 취하지 않은 것은 우리를 저들의 일개 현으로 본 것입니다. 현으로 취급당했으니 나라가 망한 것입니다. 사신을 죽이면 필경 우리를 정벌할 것이므로 역시 망하겠지만 나라가 망한 사실은 매한가지입니다.” 이에 신주를 죽였다. 초 장왕이 그 소식을 듣고 소매를 떨쳐 일어났다. 노침 앞 뜰에 이르러서야 신발을 신었고, 침문의 밖에서 검을 찼으며, 포서蒲胥의 거리에 도달한 후에야 전차에 올라탔다. 가을 9, 초 장왕이 송나라의 국도를 포위했다.


원문

楚子使申舟聘于: 無假道于.亦使公子馮聘于不假道于. 申舟孟諸之役惡: 使不害我則必死.王曰: 殺女我伐之.而行. 人止之. 華元: 過我而不假道鄙我也. 鄙我亡也. 殺其使者必伐我. 伐我亦亡也. 亡一也.乃殺之. 楚子聞之投袂而起. 屨及於窒皇劍及於寢門之外車及於蒲胥之市. 秋九月楚子.


관련 주석

楚子使申舟聘于: 신주申舟는 『좌전·문공10년』의 문지무외文之無畏이다. 해당 항목의 주석을 참조.

: 假道.: ‘무가도란 송나라 땅을 지나갈 수 있게 허락을 구하지 않다. 초 장왕은 그가 공식적으로 길을 빌리는 것을 금지하고, 그냥 송나라 땅을 경과함으로써 분쟁을 도발하려 했다.

亦使公子馮聘于不假道于. 申舟孟諸之役惡: 송나라는 초 목왕이 맹저로 수렵을 나갔을 때 인도했는데, 당시 신주는 송 소공이 목왕의 명령을 어기자 그의 시종을 매질했었다. 『좌전·문공10년』의 기사를 참조.

: : 는 눈이 밝다, 은 귀가 어둡다는 뜻으로서 여기서는 정나라는 이 일의 의미를 알아챌 수 있지만 송나라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使不害: 진나라로 향한 사신은 해를 입지 않을 것이다.

我則必死.王曰: 殺女我伐之.: 송나라가 너를 해친다면 내가 반드시 정벌할 것이다.

而行: 는 신주의 아들이다. 아들을 불러 장왕을 접견하게 한 후에 출정하였다. 아들을 왕에게 접견시킨 까닭은 장왕의 “너를 해친다면 반드시 정벌할 것”이라는 약속을 더욱 공고히 한 것이다. 다음 해 『좌전』의 “신서가 왕의 말 앞에 고개를 숙이고”라는 기사와 상통한다. 두예는 “아들을 왕에게 부탁한 것이다”라고 풀이했지만 정확하지 않다. 『좌전·정공6년』에 송의 악기가 진나라로 사신을 떠날 때 역시 그 아들을 군주에게 접견시키고 떠났지만 그것은 후계자를 세우기 위한 것이었고 이 사건과는 다르다.

人止之. 華元: 過我而不假道鄙我也: 고대에 타국의 영내를 통과할 적에는 반드시 길을 빌리는 절차를 거행해야 했다. 그러므로 『의례·빙례』에 “다른 나라를 경유할 때 길을 빌리는(過邦假道)” 예가 있었던 것이다. 「주어중」: “정왕이 선양공을 송나라에 사신으로 보내고, 이어 진나라에 길을 빌려 초나라로 갔다.” 주나라가 비록 쇠퇴했지만 천자라는 위명이 있고, 진은 더욱 작은 나라이지만 왕의 사신이 소국을 지날 때도 역시 길을 빌렸다. 그러므로 그런 절차없이 통과했기 때문에 화원이 “우리나라를 변방의 읍이나 현으로 취급하는 행위”이라고 말한 것이다. 비아鄙我란 우리를 변방의 읍이나 현으로 취급했다는 뜻이다. 『좌전·희공3년』의 “다른 나라의 국경을 넘어 먼 지역을 으로 삼는 것(越國以鄙遠), 『좌전·양공8년』의 “우리와 친하게 지내도 성과가 없다면 우리나라를 그들의 일개 현으로 삼으려고 할 것이니(親我無成, 鄙我是欲), 『좌전·성공8년』의 “대국은 만족이 없어서 우리를 그들의 읍으로 삼아도 오히려 만족치 못하고 한탄할 것입니다(大國無厭, 鄙我猶撼)” 등의 여러 “비”자의 용법은 이와 같다. 『여씨춘추·행론편』: “초 장왕이 문무외를 제나라에 사신을 보낼 때 송나라를 경유하는데도 먼저 길을 빌리는 절차를 밟지 않았다. 그가 사신 길에서 돌아오는 길에 다시 송을 지나치자, 화원은 소공에게 ‘갈 때도 올 때도 모두 길을 빌리지 않았으니 이것은 우리 송나라를 하찮은 변방의 나라로 본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송나라를 하찮은 변방의 나라로 본 것”이라는 말은 즉 송나라를 초나라 변방의 읍이나 현으로 취급했다는 말로 해석이 가능하다. 고염무의 『보증』은 “비”를 깔보다(鄙薄비박)로 해석했지만 『좌전』의 뜻이 아니다. 또 『여씨춘추』는 “갈 때도 길을 빌리지 않고, 올 때도 길을 빌리지 않았다”고 말하여, 문무외를 살해한 일은 제나라에서 다시 초나라로 돌아갈 때의 일로 보고 있어 『좌전』과 부합하지 않는듯하다. 또 “화원이 송 소공에게 말하기를”이라고 했는데, 이는 문공을 소공으로 오인한 것이다.

鄙我亡也: 『좌전·소공19년』의 “이는 진나라의 일개 현이지 어찌 나라라 할 수 있겠습니까(是晉之縣鄙也, 何國之爲)?”과 『좌전·소공16년』의 “그렇게 되면 우리는 장차 진나라 변방의 일개 현이 되어 나라의 지위를 잃을 것입니다(吾且爲鄙邑, 則失位矣).”의 뜻은 이 문구와 비슷하다.

殺其使者必伐我. 伐我亦亡也. 亡一也.乃殺之: 『여씨춘추·행론편』: “이에 문무외를 양양의 제방에서 살해했다.” 양양은 현 하남성 상구시의 동남쪽이다.

楚子聞之投袂而起: 『회남자·주술훈』: “초 장왕이 문무외가 송나라에서 살해되었다는 말에 상심하고 소매를 떨쳐내며 분기했다.” “투몌投袂”는 곧 소매를 떨치고 일어나다. 『여람·행론편』에선 “장왕이 옷소매를 잘라 다듬으려는 차에 그 소식을 전해듣고서, ‘아!’ 탄식하며 소매를 내던지고 일어섰다.”고 쓰고 있어 소매를 잘라 내버린 것으로 풀이했지만 『좌전』의 뜻은 아닌 것같다.

屨及於窒皇: 질황窒皇 『좌전·장공19년』의 질황絰皇으로서 노침 앞의 뜰이다. 『여씨춘추·행론편』에선 “뜰까지 와서야 신을 신었다”고 적고 있어서 “뜰()”로 “질황”을 풀이했다. 심흠한의 『보주』와 무억의 『의증』은 모두 이 설을 채용하고 있는데 옳다. 이때 장왕은 노침에 있었다. 옛 사람들은 실내에서 신을 신지 않는다. 는 오늘날의 신발이다. 신주가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분노하여 일어나 달리다가 신발을 미처 신지 못했다. 은 신발을 든 사람이 이곳까지 쫒아온 것이다. 소보의 『좌휴』와 계복의 『찰복』을 근거한 설명이다.

劍及於寢門之外: 침문의 밖까지 검을 든 시종이 따라와서야 비로소 장왕이 검을 차고 나섰다. 침문은 뜰의 밖에 있다.

車及於蒲胥之市: “포서지시”는 『여람』에서 “蒲疏之市”로 쓴다. 와 소 두 글자는 통한다. 포서는 지명으로서 시장이 그 안에 있었다. 이곳에 도착해서야 비로소 전차에 올라탔다.

秋九月楚子: 「송세가」: “문공 16, 초나라 사신이 송나라를 지나치는데 그는 송나라에 옛 원한이 있어서 초나라 사신을 붙잡았다. 9월 초 장왕이 송나라를 포위했다.” “초나라 사신을 죽였다”고 쓰지 않고, “사신을 붙잡았다”고 쓰고 있어서 비단 『좌전』뿐만 아니라 「초세가」와 「년표」에서 “초나라 사신을 살해했다”고 말한 것과도 다른데 아마 사마천은 다른 주장을 보존하고 싶었던 뜻이 있었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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