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 장왕의 즉위 - 투극의 반란 (춘추좌전.6.14.10)

초 장왕이 즉위했다. 영윤 자공子孔 과 반숭潘崇이 서의 여러 나라를 습격할 때 공자섭公子燮과 자의子儀에게 도성의 수비를 맡긴 후 서료舒蓼(안휘성 서성현舒城縣이 옛 서성인데, 여강현廬江縣의 동쪽 120리 떨어진 곳에 용서성이 있다. 서료舒蓼는 대략 이 두 성의 사이에 있다.)를 정벌했다. 공자섭과 자의가 반란을 일으켰다. 에 성을 쌓고 도적을 사주하여 자공을 죽이려 했지만 실패하고 돌아왔다. 8, 공자섭과 자의는 초 장왕을 대동하고 국도를 탈출했다. 상밀商密(하남성 석천현淅川縣 서쪽)로 가려던 차에 려(호북성 남장현南漳縣의 동쪽 50)의 대부 집리가 숙균과 함께 투극(자의)과 공자섭을 유인하여 죽였다

애초, 투극은 진에 잡혀 있었는데 ( 5.25.3.), 진이 효산전쟁( 5.33.3.)에서 패배하자 투극을 돌려보내 초나라와의 화친을 추구하게 했다. 투극은 화친을 성사시켰지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고, 공자섭은 영윤의 자리를 원했지만 얻지 못했다. 그래서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원문

楚莊王子孔·潘崇將襲群使公子燮子儀而伐舒蓼. 二子作亂. 而使賊殺子孔不克而還. 八月二子以楚子. 將如商密[1]誘之遂殺公子燮.

囚于之敗而使歸求成. 成而不得志公子燮求令尹而不得故二子作亂.



[1] ”를 완각본에선 “려”로 쓴다. 여기서는 『교감기』와 돈황육조 시대 사본 그리고 금택문고본을 따라 정정했다.


관련 주석

楚莊王: 장왕은 목왕의 아들이다. 「초세가」: “목왕이 즉위한 지 12년만에 죽고 아들 장왕 려 즉위했다.” 초 목왕은 작년에 죽었고 올해 장왕이 즉위했다. 『춘추』에서 이 사실을 기록하지 않은 까닭은 통보해 오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子孔·潘崇將襲群: 자공은 당시 영윤인데, 『좌전·문공11년』의 기사에 보인다. 반숭은 『좌전·문공원년』의 기사를 참조. 군서에 대해서는 『춘추·희공3년』의 기사를 참조.

使公子燮子儀: 「초어상」: “과거 장왕이 어렸을 때, 신공인 자의보가 사, 왕자섭이 부로 있었는데, 사숭과 자공을 시켜 군사를 이끌고 서를 정벌하게 하였다.” 「초어」의 왕자섭이 바로 본문의 공자섭이고 자의보가 곧 자의이며 동시에 투극이다. 『좌전·희공25년』에 보인다.


춘추좌전 지도 - 투극의 반란


而伐舒蓼: 고동고의 『대사표』에 따르면, 안휘성 서성현舒城縣이 옛 서성인데, 여강현廬江縣의 동쪽 120리 떨어진 곳에 용서성이 있고, 서료舒蓼는 대략 이 두 성의 사이에 있다.

二子作亂. : 자공과 반숭의 군사가 성에 들어오는 것을 막았다.

而使賊殺子孔不克而還: 자공을 죽이려고 했지만 실패하고 성으로 들어오다.

八月二子以楚子: 자공을 대적하기 어려운 형세임을 알고 장왕을 끼고 영으로 도읍을 옮겼다.

將如商密: 상밀商密은 현 하남성 석천현淅川縣 서쪽으로 『좌전·희공25년』의 주석을 참고하라.

廬戢誘之: ”를 완각본에선 “려”로 쓴다. 여기서는 『교감기』와 돈황육조 시대 사본 그리고 금택문고본을 따라 정정했다. 는 초나라 읍이다. 현재의 호북성 남장현南漳縣의 동쪽 50 떨어진 곳이다. 서원고의 『국어집해』는 현재의 의성현이라고 하는데 두 지점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다. 두예: “집리戢黎는 려의 대부이고 숙균은 그의 보좌이다.

遂殺公子燮: 「초어상」: “섭과 의보가 자공과 반숭의 죄를 드러내고 그들의 재산을 나눴다(위소는 “두 장수의 죄를 드러냈다. 두 장수란 자공과 반숭이다. 은 집안의 재산이다”라고 설명한다). 그들의 군대가 돌아오자 왕과 함께 려로 갔는데 려의 집리가 섭과 의보를 죽이고 왕을 복위시켰다.『좌전』은 “상밀로 가려했다”고 적는 반면 『국어』는 “려로 가려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상밀로 가려면 려를 지나쳐야 한다. 집리가 그들을 유인하여 죽인 것이다. 『좌전·양공26년』에 따르면 석공은 이 사건 때문에 진으로 망명했다. 성공 6년 요각繞角 전투때 진은 석공을 참모로 삼았다.

囚于: 『좌전·희공25년』의 기사에 있다.

之敗: 『좌전·희공33년』의 기사를 참조.

而使歸求成. 成而不得志: 『좌전·성공13년』에 여상이 진과의 관계를 끊으며, “양공은 여전히 귀국의 옛 은혜를 잊지 못하였지만 나라의 사직이 떨어질까 두려워하여 효의 전쟁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귀국 목공의 용서를 구하려고 했었습니다. 그러나 목공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초나라와 가까이 지내며 우리 진나라를 도모했습니다. 하늘이 보우하사 초 성왕이 세상을 떠났고 이 때문에 목공은 우리를 도모하려는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라는 기사가 있는데, 본문의 사건을 말한 것이다. 다만 진과 초가 합심하여 뜻을 이루지 못한 까닭은 초왕에게 굳센 사람이 있었고, 투극이 이때 반란을 일으켜서이지 여상의 말처럼 성왕의 죽음이 전부가 아니다. 이는 외교수사이다.

公子燮求令尹而不得故二子作亂: 주석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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