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프로니쿠스의 아들 소크라테스 (중국이야기)

알로페케의 데모에 호적이 있는 소프로니쿠스의 아들 소크라테스’.”

 

기원전 6세기 아테네의 클레이스테네스(기원전 570 ~ ?)는 아테네의 고질적인 문제였던 평지당’, ‘해안당’, ‘산지당의 알력을 해소하기 위해 각 당을 10개의 구역으로 분할한 후 서로 섞어버렸다. ‘평지당1구역 + 해안당1구역 + 산지당1구역을 합쳐 ‘1트리부스로 만든 것인데 트리부스는 본래 부족을 의미했지만 이때 부족의 의미가 소멸되고 행정구역명칭이 되었다. 트리부스 내에서 또 나누고 섞어서 3개의 트리티움으로 나누고, 1 트리티움을 15개의 데모스로 구분했다. 이후 아테네는 총 150개의 데모스(10x3x15)로 행정구역으로 개편되었고 아테네 시민의 이름을 호칭할 때 부족의 구분은 없어졌고 공공장소에서 시민의 권리를 행사할 때 다음처럼 불렀다. “알로페케의 데모에 호적이 있는 소프로니쿠스의 아들 소크라테스’.” 그렇다.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아테네식 호칭이다.

 

아테네 트리부스

노 혜공의 원비는 맹자孟子이다. 맹자가 죽자 혜공은 성자聲子를 계실로 삼아 은공을 낳았다. 송 무공이 중자仲子를 낳았는데 태어날 때부터 손바닥에 무늬가 있었는데 부인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런 연유로 중자는 우리나라로 시집을 왔다. 그녀는 환공을 낳았고 (그가 어릴 때) 혜공이 서거했다. 이 때문에 은공이 즉위했고 환공을 섬겼다. (춘추좌전.1.1.0)”

 

여기 세 여인이 등장한다. 문헌에선 그녀들을 맹자’, ‘성자’, ‘중자로 호칭한다. 그러나 이 호칭이 그녀들의 본명일까? 그렇지 않다. 세 여인의 본명은 알 수 없다. 고대 중국의 여인은 생후 3개월이 지나면 이름을 지었다고 하는데, 혼인이 결정되고 비녀를 꽂으면 더 이상 그녀들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혼사 때 오고 간 이름으로 부른다.


혼사 때 오고 가는 여인들의 막 지어진 이름에는 여러 정보가 담겨 있다. 신부의 출신국을 드러내고, 자매 중에 몇 째인지의 정보도 있다. 때로는 신랑될 사람의 정보를 담기도 한다.

 

본문에 등장하는 세 여인의 공통점은 . 여기의 는 존경의 뜻을 담은 선생님의 뜻으로 쓰이는 공자, 맹자, 순자의 가 아니라 이다. 이 여인네들은 자성을 쓰는 나라의 규수들이다. 춘추시대에 자성을 쓰는 나라는 송나라 하나였다. 그러므로 이들 세 여인은 모두 송나라 출신의 여인임을 자신의 이름으로 드러낸다. 그렇다면 이들은 모두 자매였을까? 그럴 수도 있지만 아닌 것 같다.

 

셋 중 두 여인은 자매일 가능성이 높다. ‘맹자중자이다. 맹은 첫째의 뜻이고 중은 둘째의 의미이다. 내 처의 친구 중에 대만에 살고 있는 여인네 이름이 멍회(孟喜). 여아 중에 장녀다. 여전히 대만에는 이런 이름 붙이기 습관이 남아 있는 셈이다. 언니인 맹자가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자 동생 중자가 다시 혜공에게 시집을 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럼 성자는 누구일까? 고대에는 이라는 관습이 있었다. 평범한 사람들에 해당하는 일은 아니다. 군주의 장녀 맹자가 노후에게 시집갈 때 함께 딸려간 여인이다. – 때로는 딸려간 남자 시종도 으로 부를 수 있다. 이 여인들의 임무는 타국에 시집간 규수의 동무 노릇도 하고 또 그녀가 후사를 낳지 못했을 경우를 대비한 예비 재원이다. 나라 간의 혼인은 정략 결혼이다. 송나라가 공주를 시집보내며 기대하는 것은 아들을 낳아 노나라 군주의 후계를 이어 송나라와 친선 관계를 돈독히 하는 일인데 확률 상 하나로는 마음이 놓이지 않기에 여럿을 딸려 보내는 것이다. 성자 역시 송나라 출신의 범상치 않은 집안 규수였겠지만 맹자의 자매는 아니었다는 사실은 맹자가 죽은 후 그녀가 정실 부인이 되지 못하고 계실이 된 것, 그리고 다시 중자가 부인으로서 시집을 온 것을 통해 추측할 수 있다.

 

위나라의 장강莊姜’, ‘선강宣姜이라는 부인의 호칭으로 알 수 있는 정보는 그녀들이 강성의 여인이라는 것, 즉 제나라 여인이라는 사실과 맹, , 계 등을 사용하지 않은 것을 보면 앞의 이나 은 그녀들의 남편 즉 위나라의 장공과 선공의 부인이라는 사실이다. 이 관습은 동아시아에서 고대로부터 최근까지도 질기게 이어져 내가 어릴 때만해도 주변의 아주머니들은 서로를 “OO으로 부르기도 했다. 수원댁, 서울댁, 대전댁…. 써 놓고 보니 출신대학 같기도 하네.

 

고대 중국인에게 이름이란 어떤 의미일까? 남성도 성인이 되면 절대 그를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다. 귀족이 자신의 이름을 밝히는 경우는 군주 앞에서 말할 때 자신을 이름으로 드러내는 외에는 없다. 존경 혹은 두려움이다. 심지어 한 나라의 군주도 천자 앞에선 자신을 이름으로 호칭한다. 혹시 『춘추』에서 어떤 이의 이름을 썼다면 열이면 아홉이 그를 비난할 때이다. 이름은 최대한 숨기고 드러내지 않아야 하는 어떤 것인데 그 이름이 막중한 책임을 가졌다는 사실은 제후들 간의 결맹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신령 앞에서 결맹에서 맹세를 작성하고 서명할 때는 반드시 제후라도 그의 이름을 써서 약속한다는 사실이다.

 

성인 남성을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 습관은 동아시아 전통 사회에 꾸준히 지속되어 우리는 여전히 율곡, 퇴계 등이 그의 본명보다 귀와 입에 익숙하고 최근까지도 유력 정치인을 DJ, YS 등 이름이 아닌 이니셜로 부르는 것을 더 편하게 여긴다.

 

국회에서 새 법률을 발의하고 이를 호칭할 때도 미국에서도 입안자 의원의 이름을 앞에 놓아 예를 들면 도드-프랭크 법등으로 부르는데 이는 그리스 로마의 전통을 따른 것이고, 우리는 발의를 주도한 의원이 아닌 민식이법등으로 호칭하길 좋아한다.


이름을 드러내고 숨기는 것엔 어떤 문화적 배경이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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