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나라의 봉건 (춘추좌전.5.24.2.)
(기원전 640년) 정나라가 활滑나라로 쳐들어가자 활나라는 정나라의 명을 따르는 척하다가 군대가 물러나자
다시 위나라에 붙었다. 정나라의 공자사公子士와 설도유미洩堵俞彌가 군사를 이끌고 활나라를 정벌했다. 양왕은
백복伯服과 유손백游孫伯을 정나라에 파견하여 활나라를 위해 청탁했다. 정 문공은 과거 혜왕이 선군 여공의 도움으로 복위할 수 있었는데도 여공에게 예기를 하사하지 않았던 일을 서운하게 여기고 있었는데(☞ 3.21.1.), 양왕이 위나라와 활나라 편을 들자 원망하였다. 그래서 왕명을 따르지 않고 두 사람을 억류했다. 양왕은 분노했고
적狄의 군사를 끌어들여 정나라를
정벌하려 했다. 부진이 왕에게 간언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신이 들으니, 덕으로 백성을 어루만지는 것이 최선이고, 차선은 인척을 친밀하게 대우하여 덕이 멀리 미치게 하는 것입니다. 과거
주공이 관숙과 채숙이 죽임을 당한 것을 애석하게 여기고 친척들을 분봉하여 주나라를 지키는 병풍으로 삼았습니다. 그중
관管·채蔡·성郕·곽霍·노魯·위衛·모毛·담聃·고郜·옹雍·조曹·등滕·필畢·원原·풍酆·순郇 등은 문왕의 아들(昭)을 봉건한 나라이고, 우邘·진晉·응應·한韓나라 등은 무왕의 아들(穆)을 봉건한 것이며, 범凡·장蔣·형邢·모茅·조胙·채祭나라 등은 주공의 후손(胤)들을 세운 나라들입니다.
소목공 당시 주나라의 덕이 예전 같지 않아
성주成周에 종족을 규합한 후 시를 지어 노래했습니다. ‘아가위 꽃이여! 꽃잎과 꽃받침이 서로 감싸주니 아름답구나.
오늘날 사람들 중에 형제만 한 사람은 없어라.’
그 시의 네번째 장을 보면, ‘형제가 담장 안에선 서로 다투더라도 집밖의 모욕은 함께 막아낸다.’고 합니다. 이와 같다면 형제 간에 비록 작은 분란이 있더라도 그
깊은 친밀함은 버리지 않는 법입니다. 지금 천자께서 집안의 작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친척인 정나라를
버리려 하시니 이것이 웬 말입니까? 공로를 보상하고, 친척을
가까이하고, 가까운 이웃을 친밀하게 대하고, 현명한 이를
높이는 것이 가장 큰 덕입니다. 어두운 귀를 가진 사람을 가까이하고,
아둔한 이를 따르며, 완고한 이와 교유하고, 거짓말하는 사람을 등용하는 것은 간악함 중에도
가장 큰 것입니다. 덕을 버리고 간악함을 높이는 일은 가장 큰 재앙입니다.
정나라는 평왕과 혜왕에게 큰 공로가 있고, 또 여왕과 선왕의 친척입니다. 또 간악한 신하들을 내치고 현명한
신하 셋을 등용하였고, 다른 희성의 나라들보다 거리가 가까운 이웃이니 네 가지 덕을 모두 갖추고 있습니다. 귀가 다섯 가지 음의 조화를 구별하지 못하는 것을 ‘롱聾’이라 하고, 눈이 다섯 가지 색의 아름다움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을 ‘매昧’라 하며, 마음이 덕과 의의 큰 도리를 따르지 못하는 것을 ‘완頑’이라 하고, 입이 진실된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을 ‘은嚚’이라 합니다. 적狄은 이 모든 것을 따르니 네 가지 간악함을 모두 가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나라가 의로운 덕을 가졌을 때도 ‘형제만 한 이는 없다’며 친척들을 봉건했습니다. 천하를
회유할 때도 오히려 외부의 침략을 우려하였습니다. 외침을 방어하는 일은 친척을 가까이하는 것만 한 것이
없었기 때문에 친척들을 주나라의 병풍으로 세웠던 것입니다. 과거 소목공도 이처럼 말했는데, 지금처럼 주나라의 덕이 이미 쇠퇴한 때에 주공과 소공의 법을 버리고 간악한 자들을 따르는 것은 불가하지 않겠습니까? 백성들은 아직 지난 번의 재앙을 잊지 못하였는데 왕께서 다시 적인을 불러들이려 하시니 문왕과 무왕의 덕은 어쩌시려고
합니까?” 왕은 부진의 간언을 듣지 않고 퇴숙頹叔과 도자桃子를 사신으로 보내 적의 군사를 동원했다.
여름, 적狄이
정나라를 정벌하여 역櫟(하남성 우현禹縣)을 빼앗았다.
양왕이 적狄의 공로에 감사하고 그 여식을 왕후로 삼으려 했다. 부진이 간언했다. “불가합니다. ‘은혜를 갚는 사람은 이미 지쳤는데 베푼 이는 여전히 만족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적狄은 본래도 탐욕스러운 데 왕께서
그들을 더욱 탐욕스럽게 만들고 계십니다. 여인의 욕심이 가없고, 부인의
원망은 끝이 없다고 하니, 적狄은 필경 우환이 될 것입니다.”
왕은 듣지 않았다.
애초, 감소공甘昭公(왕자대)은 혜후의 총애를 받았고, 혜후는 왕자대를 옹립하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죽었다. 소공이
제나라로 도망쳤다가 양왕이 그의 지위를 복권해 주었지만 또다시 외씨隗氏(적 출신의 왕후)와 간통을 저질렀다. (☞ 5.11.3, 5.12.3, 5.22.6.) 왕은 그녀를 폐출했고
퇴숙과 도자가 우려했다. “실로 우리가 적인의 여식을 왕후로 세운 것이나 다름없으니 저들은 우리를 원망할
것이다.” 결국 왕자 대를 받들고 적의 군사를 동원해 양왕을 공격했다.
어사들이 맞아 싸우려 하자 왕이 말하였다. “돌아가신 모후께서 나를 뭐라 하시겠느냐? 차라리 제후들에게 그를 도모하게 부탁하는 것이 낫다.” 그리고 경사를
떠나 감감坎欿(하남성 공현鞏縣 동남쪽)까지 갔지만 국인들이 그를 도와 귀국시켰다.
가을, 퇴숙과 도자는 왕자대를 추대하고 적의 군사를 동원하여 주나라를 쳤다. 주나라 군사를 크게 물리치고 주공기보, 원백, 모백, 부진 등을 잡거나 죽였다. 왕은 정나라로 도망쳐 범氾(하남성 양성현襄城縣 남쪽)에 거처했고, 왕자대는 외씨와 함께 온溫(하남성 온현溫縣 서남쪽)에 거처했다.
원문 (5.24.2.)
鄭之入滑也,滑人聽命. 師還,又卽衛. 鄭公子士·洩堵俞彌帥師伐滑. 王使伯服·游孫伯如鄭請滑. 鄭伯怨惠王之入而不與厲公爵也,又怨襄王之與衛·滑也. 故不聽王命,而執二子. 王怒,將以狄伐鄭. 富辰諫曰: “不可. 臣聞之: 大上以德撫民,其次親親,以相及也. 昔周公弔二叔之不咸,故封建親戚以蕃屏周. 管·蔡·郕·霍·魯·衛·毛·聃·郜·雍·曹·滕·畢·原·酆·郇,文之昭也. 邘·晉·應·韓,武之穆也. 凡·蔣·邢·茅·胙·祭,周公之胤也. 召穆公思周德之不類,故糾合宗族于成周而作詩,曰: ‘常棣之華,鄂不韡韡. 凡今之人,莫如兄弟.’ 其四章曰: ‘兄弟鬩于牆,外禦其侮.’ 如是, 則兄弟雖有小忿,不廢懿親. 今天子不忍小忿以棄鄭親,其若之何? 庸勳·親親·暱近·尊賢,德之大者也. 卽聾·從昧·與頑·用嚚,姦之大者也. 弃德·崇姦,禍之大者也. 鄭有平·惠之勳,又有厲·宣之親,弃嬖寵而用三良,於諸姬爲近,四德具矣. 耳不聽五聲之和爲聾,目不別五色之章爲昧,心不則德義之經爲頑,口不道忠信之言爲嚚. 狄皆則之,四姦具矣. 周之有懿德也,猶曰 ‘莫如兄弟’,故封建之. 其懷柔天下也,猶懼有外侮; 扞禦侮者,莫如親親,故以親屏周. 召穆公亦云. 今周德旣衰,於是乎又渝周·召,以從諸姦,無乃不可乎? 民未忘禍,王又興之,其若文·武何?” 王弗聽,使頹叔·桃子出狄師.
夏,狄伐鄭,取櫟.
王德狄人, 將以其女爲后. 富辰諫曰: “不可. 臣聞之曰: ‘報者倦矣,施者未厭.’ 狄固貪惏,王又啟之. 女德無極,婦怨無終,狄必爲患.” 王又弗聽.
初,甘昭公有寵於惠后,惠后將立之,未及而卒. 昭公奔齊,王復之,又通於隗氏. 王替隗氏. 頹叔·桃子曰: “我實使狄,狄其怨我.” 遂奉大叔,以狄師攻王. 王御士將禦之,王曰: “先后其謂我何? 寧使諸侯圖之.” 王遂出,及坎欿,國人納之.
秋,頹叔·桃子奉大叔以狄師伐周, 大敗周師,獲周公忌父·原伯·毛伯·富辰. 王出適鄭,處于氾. 大叔以隗氏居于溫.
▣鄭之入滑也,滑人聽命: 두예: “활나라를
침략한 일은 희공 20년에 있었다.”
▣師還,又卽衛. 鄭公子士·洩堵俞彌帥師伐滑: 공자사公子士에 대해선 『좌전·희공20년』을
참조하라. 설도유미洩堵俞彌는 설도구洩堵寇로 여겨진다. 홍량길의 『좌전고』는 설을 씨로 도유미를 이름으로 설명한다. 유정섭兪正燮의 『계사존고癸巳存稿』, 장병린의 『좌전독』은 설도를 씨로 구와 유미를 이름으로 보지만 어느 것이 옳다고 증명할 순 없다. 진후휘陳厚輝의 『보춘추세족보補春秋世族譜』는 두예의 주석을 오해하여 “정鄭 공자사설公子士洩”을 한 이름으로 봤지만 이는 옳지 않다. 이돈李惇의 『군경식소羣經識小』를 함께 참고하라.
▣王使伯服·游孫伯如鄭請滑: “백복伯服”은 「정세가」에선 “백비伯犕”로 쓰고,
「주본기」에선 그대로 “백복”으로 쓴다. 두예는 “두 사람은 모두 주나라 대부”라고 설명한다. 청활請滑이란 활나라를 위해 청탁한 것으로서 정벌하지 않도록 부탁했다.
▣鄭伯怨惠王之入而不與厲公爵也: 이 사건의 기사는 『좌전·장공21년』에
있다. 『좌전』에 근거하면, 작爵은 주기酒器를 말한다. 일찍이 괵공에게 주었던 것이다. 「정세가」: “정 문공은 혜왕이 역櫟에 망명했었던 사건을 원망했는데, 문공의 부친인 여공이 혜왕을 도와 복국시켜 주었는데 혜왕은 여공에게 작록을 내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마천은 작爵을 작록爵祿이라고 해석했지만 이것은 『좌전』의 뜻은 아니다.
▣又怨襄王之與衛滑也: 활나라는 정나라를 배신하고 위나라에 붙었는데, 주 혜왕이 사주한 것으로 여겼다.
▣故不聽王命,而執二子: 「주어중」: “양왕 13년 정나라가 활나라를 정벌했다. 활나라를 위해 유손백을 보냈지만 정나라는 그를 억류했다.” 「주어중」에서는
양왕 13년, 즉 희공 23년의
일이라고 적어 『좌전』과 차이가
있다. 또 「주어중」에서는 유손백을 억류했다고 하고, 「주본기」와
「정세가」는 모두 “백복을 잡아 가두었다”고 말하고 있다. 모두 두 사람이 아닌 한 사람만을 언급하고
있다.
▣王怒,將以狄伐鄭. 富辰諫曰: “不可. 臣聞之: 大上以德撫民,其次親親,以相及也: 『좌전·양공24년』: “최선은 덕을 확립하는 것(立德)이고, 그 다음은 공적을 이루는 것(立功), 그 다음은 교훈이 될 만한 말(立言)을 하는 것입니다.” 대상과 기차는 중요성에 따라 나열한 것이다. 『좌전·양공24년』의 주석을 참고하라. “親親以相及”은 친속과 먼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리고 가까운 곳에서 먼 곳으로 확대하는
것이다. 소위 은혜는 가까이에서부터 멀리까지 미루어 확대하는 것이 옳다는 뜻이다.
▣昔周公弔二叔之不咸: 조弔는 슬퍼하다. 이숙은 관숙과 채숙이다. 두예는 마융의 설명에 근거해서 이숙을 “하나라와
은나라의 말세”라고 해석했는데 옳지 않다. 왕인지의 『술문』과 이이덕의 『집술』을 참조하라. 함咸은 죽음(終)의 뜻이다. 불함不咸이란 제 명에 죽지 못함(不終부종)의 뜻이다. 이에 대해
양수달 선생의 『적미거소학술림·시돈상지족극함궐공해詩敦商之族克咸厥功解』를 참조하라.
▣故封建親戚以蕃屏周: 봉건이란 토지를 분봉하여 나라를 세움이다. 친척은 고대에 여러 뜻이 있었다. 『좌전·소공20년』의
“부모親戚를 살륙하는 일은 그 어떤 것으로도 보상이 될 수 없습니다”, 『대대례기·증자질병편』의 “부모親戚가 죽은 후에 비록 효도를 한다해도 누구에게 할 것인가?”, 『맹자·진심편』의 “사람에게 있어서 부모親戚와 군신 그리고 상하관계를 잃는 것보다 더 큰 문제는 없다.”
등에서 친척은 모두 부모를 가리킨다. 한편 같은 가문 일족의 사람 역시 친척이라고 할 수 있다. 『전국책·진책1』의 “부귀는 친척조차 두려워하는 것(富貴則親戚畏懼)”이라는 말은 소진이 그 처와 형수를 가리켜 한 말이다. 본문에서는
형제와 자식 조카들을 가리킨다. 또 친척으로 혼인관계로 맺어진 사람 역시 가리킬 수 있는데, 고대에도 이런 뜻이 있었다. 예를 들면 『예기·곡례상』의 “형제
친척이 그 자애함을 칭찬하며(兄弟親戚稱其慈也)”, 「진어4」의 “친척을 아끼고 현명한 인재를
널리 쓰고(愛親戚, 明賢良)”, 「초어하」의 “이들은 그대의 형제요 친척이다(此爾兄弟親戚)”등이 그 예이다.
번병蕃屏은 주나라 왕실을 위한 많은 울타리로 만든다는 뜻이다.
▣管·蔡·郕·霍·魯·衛·毛·聃·郜·雍·曹·滕·畢·原·酆·郇,文之昭也: 이상 16개국은 모두 문왕의 아들에게 봉건된 나라이다. 관管은 「관채세가」에서 “무왕이 은나라의 주 임금을 멸하고 천하를
안정시킨 후 공신과 여러 형제를 봉건했다. 이때 관선을 관에 봉건했다.”고
말하고, 또 “관숙선은 반란을 일으켜 주살되었고 후사가 없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여기 본문의 뜻에 따르면 관을 봉건한 사람은 주공이고 그 당시 관숙과 채숙은 아직 후사가
끊기지 않았을 때이므로 자못 다른 바가 있다. 왕인지의 『술문』은 “여기서 관숙에 관한 일은 우연히
언급된 것으로서 글자에 연연할 필요는 없다.”고 설명했다. 관管은 현 하남성 정주시에 해당하고 춘추시대 이전에 이미 절봉되었으며 회檜에 속했다가 회가 다시 정나라에게 귀속되었다. 『좌전·선공12년』의 “초나라 군사가 관에 주둔했다”는 기사에서의 관이 바로 이 지역이다.
채蔡는 『춘추·은공4년』의
주석을 참조.
성郕은 『춘추·은공5년』의 주석을 참조.
곽霍은 『좌전·민공원년』의 주석을 참조.
모毛는 『상서·고명』과 『목천자전』5, 그리고 옛 기인 반기班旣, 모백돈毛伯敦, 모공정毛公鼎에서 모두 모공毛公으로 호칭하고 있다. 「주본기」와 『일주서·극은해』에선 모두 문왕의
아들 모숙정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 인물이 모에 처음 봉건된 사람이다. 고동고의 『대사표』5는 그 봉지를 현 하남성 의양현宜陽縣 부근이라 했다. 모공정에 근거하면 서주시대 초엽 모공□은 주나라의 경사였고, 모공정과 모백돈이 모두 부풍현에서 출토되었기 때문에 모공의 채읍이 서주시대에는 부풍현扶風縣에 있었다가 동천 후 낙양부근으로 옮겨진 것임을 추측할 수 있다. 이해의
『좌전』에 모백이 등장하는데 그의 후손이라 할 수 있다. 모는 제후의 봉지는 아니며 채읍이다. 이하 26개 분지 중 어떤 것은 제후이고 어떤 것은 왕기 내의 채읍이다. 비록 기내에 있다해도 역시 봉건이므로 번병이라 말할 수 있다. 보다
자세한 설명은 염약거의 『상서고문소증』5의 상을 참고하라.
담聃의 음은 남南이고, 「관채세가」에 “무왕의 사망 후 성왕이 어렸기 때문에 주공 단이 왕실의 전권을 장악하고 계재季載를 재再에 봉건했다.”고 말한다. 여기서
재가 곧 담이다. 『좌전·문공14년』에 주나라에 담계聃啓가 언급되는데 혹 그의 후손이 아닌가싶다. 고동고의 『대사표』5에선
계재의 나라가 나처那處에 있다고 하는데 즉 『좌전·장공18년』의 “권의 백성을 나처로
이주시켰다”는 기사의 나처에 해당한다. 현 호북성 형문현荊門縣의 동남쪽의 나구이다. 그러나 왕원손의 『국어발정이』와 양옥승의 『한서인표고삼· 그리고 요범의
『원순당필기』12에선 모두 문왕의 소(아들) 16명 중에서 계재가 가장 어리기 때문에 먼 형초 지역에 봉건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강영의 『고실』은 『국어·주어중』에서 담은 정희로 인해 멸망했고, 정나라에
담백이 있었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담은 개봉 근처에 있다고 주장하는데 옳을 수도 있다. 심가본의 『사기쇄언』과
주서증의 『개유익재독서속지』는 모두 담나라의 멸망은 노나라 환공과 장공 사이 기간이었다고 주장한다.
고郜는 『춘추·환공2년』의 주석 참고.
옹雍은 『통지·씨족략』2에 따르면 문왕의 열세번째 아들 옹백이 봉건받은
나라이다. 현 하남성 수무현修武縣의 서쪽, 심양현沁陽縣의 동북쪽이다. 전해지는
동기에 □王戟·옹공함정雝公緘鼎·옹백원정雝伯原鼎·옹자량인권邕子良人鬳 등이 있는데 이것이 옹나라의 이기인지는 알 수 없다.
필畢은 전해지는 동기로 伯□父□鬲이 있는데, 그 명문에
“伯□父가 필희를 위해 □鬲을 제작했다”는 글이 있다. 즉 필이 희성임은 의심할 바가 없다. 현 섬서성 서안시와 함양시 서북쪽에 위치했고 2,3백리에 걸쳐 펼쳐져
있었으며 위수가 남북으로 흐르고 있는 곳이다. 보다 자세한 설명은 『좌전·민공원년』의 “필만”에 관련된
주석을 참조하라.
원原은 『좌전·장공18년』에 원장공이 언급되는데 그의 후손으로 생각된다. 현 하남성 제원현濟源縣의 서북쪽에 원향原鄕이 있는데 원나라가 처음 봉해진 곳에 해당한다. 은공11년에
언급되는 원이기도 하다.
풍酆은 “풍豐”으로도 쓴다. 고동고의
『대사표』5에선 “풍은 본래 상나라 시대의 숭후호崇侯虎의 땅이다. 문왕이 숭을 멸하고 숭읍으로 삼았고 무왕이 그의 동생을 봉하여 풍후로 삼았다.
『죽서기년』 성왕19년 풍후를 축출한 후 절봉되었다.”고
말한다. 고동고가 인용한 “성왕이 풍후를 축출했다”는 말은 금본 『죽서기년』에 보이고 있어서 근거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후한시대 최인의 『주잠』에선 “풍후는 술에 빠져 술병을 지고 살았다. 세상에 욕을 보인 그의 모습을 그려 후대의 훈계로 삼았다.”고 말한다. 이우李尤의 명문에도 “풍후는 주색에 빠져 방탕하였다. 그래서 그의 모습을
그려 음주의 훈계로 삼았다.”고 말한다. 즉 풍후는 술을
너무 좋아해서 축출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 섬서성 호현戶縣의 동쪽 함양시의 남쪽에 해당한다. 전해지는 이기로는 풍정豐鼎과 풍혜호기豐兮戶旣 등이 있다.
순郇은 『시·조풍·하천下泉』의 “순백郇伯이 수고하여”에서의
순백은 그의 후손에 해당한다. 현 산서성 임의현臨猗縣의 서남쪽에서 멀지 않다. 윗글에서 “군대가 순에 진을 치고”라는 말을 보면 일찍이 진나라에게
멸망되었다. 어떤 이는 『좌전·환공9년』의 순국이라고 말한다. 전해지는 동기로 순백대부기筍伯大父旣·순백기筍伯旣·순백언筍伯甗 등이 있는데 이 나라의 이기이다. 소목에 대해서는 『좌전·희공5년』의 주석을 참조. 주나라는 후직을 태조로 삼고, 부줄 이하 이소일목이 된다. 문왕은 부줄이래 14세로서 세차로 목이 되므로 그의 아들은 소가
된다.
▣邘·晉·應·韓,武之穆也: 모두 무왕의 아들이다. 우邘는 『당서·재상세계표』2하에 보면 주 무왕의 둘째 아들 우숙이 봉건받은 나라이다. 현 하남성
심양현의 서북쪽 20리 떨어진 곳에 해당한다. 그러나 왕국유는
대소의 두 우정盂鼎이 모두 섬서성 미현郿縣의 예촌禮村에서 발견되었고 대우정의
명문에 보면 왕이 우를 파견하여 나랏일을 담당하게 한 일은 성왕23년이며; 소우정의 명문에 보면 우가 귀방을 정벌하여 전리품과 포로를 바친 일이 성왕25년
때의 사건임을 알 수 있다. 즉 두 정의 출토지가 그 봉건지에 해당한다고 주장한다. 자세한 설명은 『관당집림·귀방곤이험윤고』를 참조하라. 충분히 일리있는
주장이다.
응應은 응공정應公鼎·응공준應公尊·응후기應侯旣 등의 기가 전해지는데, “응”자를 “안雁”으로 쓰고, 응공치應公觶에서는 “□”로 쓴다. 『통지·씨족략』2에선 무왕의 네번째 아들이 봉건받은 나라라고 하며, 그 옛성은 현 하남성 노산현魯山縣의 동쪽 30여리 떨어진
응현應縣이라고 말한다. 전해지는
이기엔 응후종應侯鐘이 있다.
한韓은 『시·대아·한혁』은 한후가 명을 받은 일에 대해 노래한 것인데 이를 보면 선왕 때 강성했음을 알 수 있다. 그 봉지는 본래 현 하북성 고안현固安縣의 동남쪽 안채영韓寨營이다. 고염무의 『일지록』3에 자세하다. 뇌학기의 『죽서기년의증』역시 한의 첫 봉건지는 연나라에서
가깝고 후에 한성으로 천도했다고 주장했다. 강영의 『군경보의』와 손작운의 『시경여주대사회연구』에서는
한나라는 처음에 섬서성 한성에 봉건되었고 선왕 때 다시 북안에 봉건되었는데 즉 현재의 고안현이라고 주장하여 앞의 설과 상반되는데 신뢰할 수 없다. 춘추시기 전에 진나라에게 멸망당했고 『좌전·환공3년』의 “한만”에
대한 주석에 자세하다. 무왕은 세차로 소에 해당하므로 그의 아들은 목이 된다.
▣凡·蔣·邢·茅·胙·祭,周公之胤也: 윤은 후사이다.
범凡은 『춘추·은공7년』의 주석 참조.
장蔣은 『통지·씨족략』2에 따르면 주공의 셋째 아들 백령伯齡을 봉건한 나라이다. 두예의 주석에 근거하면 현 하남성 고시현固始縣의 동북쪽에 장집蔣集이 있는데 그곳에 해당한다. 고사기의 『지명고략』은 『환우기』에
근거해서 현 위씨현尉氏縣의 서쪽 60리 떨어진 곳에 장성蔣城이 있는데 장국이 봉해진 옛 땅이라고 한다. 『당서·재상세계표』15하에 따르면 현 하남성 신양 지구의 광산현光山縣 서쪽 50리 떨어진 지역이라 한다. 첫번째 주장이
신뢰할 만하다. 전해지는 이기로 장태기(將/鼎)兌旣·장자작(將/鼎)子爵이 있다.
형邢은 『좌전·은공4년』의 주석 참조.
모茅는 모백이 봉건된 곳으로 그 옛성은 현 산동성 금향현金鄕縣 모향茅鄕이다. 후에 주邾나라에게 귀속되었고, 『좌전·애공7년』의 “성자成子가 모茅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는 기사가 그 예이다.
조胙는 『청일통지』에 따르면 그 옛성은 현 하남성 연진현延津縣의 북쪽에 있는 옛 조성胙城의 동쪽에 해당한다.
제祭는 『광운』에선 주공의 다섯번째 아들이 봉건된 나라이고 나머지 설명은 『춘추·은공원년』의 “제백이 조회했다”는
기사의 주석 참조. 제백의 제와 정나라 제중의 식읍의 제는 서로 다른 땅이다. 전자는 현 정주시의 동북쪽이고 후자는 중모현中牟縣이다. 『한서·왕망전』에선 “성왕이 주공의 서자들을 널리 봉건하였는데
여섯아들 모두 모토茅土가 있었다.”고 말한다. 즉
본문의 여섯 아들은 모두 주공의 서자임을 알 수 있다. 희성이 봉건받은 지역은 다수 황토층이나 충적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당시 농업생산 측면에서 보면 가장 좋은 아니면 비교적 좋은 지대의 땅이었다.
▣召穆公思周德之不類: 소목공은 소공 호虎이다. 『세본』에 근거하면, 그는
소강공의 16세손이다. 현재 섬서성 기산현岐山縣 서남쪽에 예전에 소정召亭이 있었는데 기내의 채지이다. 동천한
후에는 현재의 산서성 원곡현垣曲縣의 소정이 그의 채읍이다. 『시·대아·상유桑柔』의 “탐욕 많은 이들이 선한 사람들을 모두 망치네(貪人敗類)”에 대한 모형의 『전』은 “류類는 선함善의 뜻이다.” 소목공은 주 여왕 시대의 사람으로 주나라의 덕이 쇠미한 때의 인물이기 때문에 불류不類, 선하지 않다고 말했다.
▣故糾合宗族于成周而作詩: 규糾는 모으다의 뜻인데 여기 규합은 연언이다. 문맥을 보면 이 시란 『소아·상체』를 말한다. 하지만 「주어중」의 “주 문공의 시를 보면” 운운하는 내용을 보면
「주어」는 이 시를 주공 단이 지은 시로 보고 있어서 『좌전』과는 다르다. 두예는 “소목공이 특별히
주공의 이 시를 노래했다”라고 해설하여 『국어』와 『좌전』의 주장을 절충하려 했다. 옛 사람들이 부시賦詩라고 언급할 때 두 가지 뜻이 있는데 자작시도 부라하고, 이전 사람의 시를 노래하는 것 역시 부라고
한다. 하지만 작시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자작시를 말할 뿐이다. 그러므로
두예의 주석은 옳지 않다. 『시』의 “凡今之人,莫如兄弟”를 보면, 주공은 관숙과 채숙을 죽였기 때문에 이것은 주공이 지은 시가 아니다. 양수달 선생의 『적미거금문설·六年琱生旣 (卽召伯虎旣跋』에 설명이 자세하다. 성주는
서주시대에 본래 제후를 규합하여 명령을 내리는 곳이었다. 『일주서·왕회편』에 “성주에서의 회합(成周之會)”라는 구절이 있다. 『영이명』에는 “10월 초 계미일에 명공明公이 성주成周를 조회하고 명령을
내렸다”는 구절 등으로도 더욱 이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다.
▣曰: ‘常棣之華,鄂不韡韡: 상체는 아가위 나무이다. 양류과에 속하며 낙엽교목이며 자라면 키가 30미터까지 자란다. 봄에 나뭇잎이 먼저 나고 꽃이 핀다. 화韡는 현재의 화花자와 같다. 악鄂자는 현재 악萼(꽃받침)자로 쓴다. 부不는 다리(跗부)의
뜻이고 꽃받침의 다리를 말한다. 꽃의 구조를 보면, 꽃아래
꽃받침이 있고, 그 아래에 꽃받침 다리가 있다. 『관자·지원편地員篇』의 “붉은색 꽃받침 다리 노란 과실(朱跗黃實)”로 이를 설명할 수 있다. 이 글자는 부柎 혹은 부拊로도 쓴다. 『산해경·서산경西山經』의 “둥근런 잎사귀에 하얀 받침대 다리(圓葉而白柎)”로 증명할 수 있다. 위위
▣凡今之人,莫如兄弟.’: 상체, 공영달의 『소』: “아가위 나무의 꽃과 꽃받침이 매우 아름답다는 뜻이다. 꽃은 받침을 덮고, 받침은 꽃을 받들어 꽃과 받침이 서로를 덮어주니
위위하여 더욱 밝게 빛난다. 꽃과 받침이 서로 덮어주어 밝게 빛나는 모양이 마치 형제가 서로 순종하여
영화를 더욱 빛나게 하는 듯하다. 그러므로 오늘날 사람들은 그 은혜와 친밀함의 두터움이 형제만 한 것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
▣其四章曰: ‘兄弟鬩于牆,外禦其侮.’: 혁鬩은 현재의 음은 극隙이다. 『설문』: “끊임없이
다투다(恒訟).” 『국어·주어중』: “형제가
서로 다투다(兄弟讒鬩)”, 위소의 주석: “어그러지다(佷흔).” 이는 형제가 비록 안으로는 화목하지 않아도 한 마음으로
외침을 방어한다는 말이다.
▣如是, 則兄弟雖有小忿,不廢懿親: 두예: “의懿는 아름다움美의 뜻이다.”
장병린의 『좌전독』은 의친懿親을 가까운 것에 의지하여(因親)라고 풀이한다.
▣今天子不忍小忿以棄鄭親,其若之何?: 「주어중」: “이처럼 서로 다투어 안으로는 경멸해도 그 친밀함을 완전히 없애지는 않았다.
정나라는 천자에게 있어서 형제의 나라이다.”
▣庸勳·親親·暱近·尊賢,德之大者也: 용庸은 『상서·익직益稷』의 “수레와 의복을 내려 보답한다(車服以庸)”에서의 용과 같다. 즉 그의 공로에 대해 보상하다. 용훈은
바로 공훈이 있는 이에게 보상하는 것을 말한다.
▣卽聾·從昧·與頑·用嚚,姦之大者也: 은嚚의 소리는 은銀이다. 어리석고 악하다.
▣弃德·崇姦,禍之大者也. 鄭有平·惠之勳: 두예: “평왕이
동천할 때 진나라와 정나라의 도움에 의지했다. 혜왕이 망명했을 때 괵나라와 정나라가 혜왕을 다시 귀국시켰으니
그 공적을 말한다.” 「주어중」: “우리 주나라가 동천할
때 진나라와 정나라의 도움을 입었다. 자퇴의 난리 때 역시 정나라가 왕의 지위를 안정시켰다.”
▣又有厲·宣之親: 두예: “정나라에
처음 봉건된 시조는 환공우桓公友인데, 주 여왕의 아들이며 선왕의 동모제이다.” 이것이 친친親親이다. 「정세가」는 “(환공우는) 선왕의 서제庶弟”, 「년표」는 “모친이 같은 형제”라고 적어서
『좌전』과 같다.
▣弃嬖寵而用三良: 두예: “7년, 총애하던 신하 신후申侯를 죽이고
16년, 사랑하는 아들 자화子華를 죽였다. 삼량은 숙첨叔詹·도숙堵叔·사숙師叔을 말한다.”
고염무의 『보정』: “자화를 죽인 일을 인용하여 해석한 것은 적당하지 않다. 옛 사람들은
대략적으로만 말할 뿐이다. 여기서는 정백의 현명함을 보여주고 왕은 당연히 그를 존중해야 함을 보여준
것이다.” 폐총은 한 단어이다. 두예는 이를 분리해서 각각
해석했는데 적절하지 않다. 『좌전·선공12년』의 주석에 상세하다.
▣於諸姬爲近: 두예: “(주나라와 정나라는) 거리가 가까우니 친밀히 지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다케조에 고코의 『회전』: “거리가 가까운 것이 네가지 덕 중의 하나로 보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여기서 근은 친근의 근이다. 즉 정 환공이 천자의 사도로, 무공과 장공이 경사를 지내며 대대로 왕과 가장 가깝게 지냈으며, 진나라와
위나라 등 왕실과 소원했던 나라들과는 다르다.”
▣四德具矣. 耳不聽五聲之和爲聾,目不別五色之章爲昧,心不則德義之經爲頑,口不道忠信之言爲嚚. 狄皆則之,四姦具矣. 周之有懿德也,猶曰 ‘莫如兄弟’,故封建之. 其懷柔天下也,猶懼有外侮; 扞禦侮者,莫如親親,故以親屏周. 召穆公亦云. 今周德旣衰,於是乎又渝周·召: 투渝는 바꾸다의 뜻이다.
▣以從諸姦: 종간이란 적狄의 군사를 빌린 것을 말한다.
▣無乃不可乎? 民未忘禍: 두예: “이전
자퇴의 변란을 말한다. 그때 숙대가 적의 군사를 불러들였기 때문에 백성들이 아직 그때의 재앙을 잊지
않고 있다고 말한 것이다.”
▣王又興之,其若文·武何?”: 두예: “문왕과 무왕의 공적을 없애려 한 것이다.”
▣王弗聽,使頹叔·桃子出狄師: 두예: “두
사람은 주나라 대부이다.”
▣夏,狄伐鄭,取櫟: 역櫟은 현재의 하남성 우현禹縣으로 『춘추·환공15년』의 주석에 자세하다.
▣王德狄人: 덕德은 감사하다의 뜻.
▣將以其女爲后. 富辰諫曰: “不可. 臣聞之曰: ‘報者倦矣,施者未厭.’: 은혜를
베푼 사람은 큰 보상을 원하며 만족을 모르지만 갚는 사람은 이미 지쳤다는 의미.
▣狄固貪惏: 람惏은 람婪과 같고,
탐하다의 뜻.
▣王又啟之: 적인의 딸을 왕후로 삼는 일은 그들에게
보상이 무한하다는 사실을 일러주는 셈이다.
▣女德無極,婦怨無終,狄必爲患.” 王又弗聽: 「주어중」에서도 이 일을 기술하고 있다.
▣初,甘昭公有寵於惠后: 감소공은 혜왕의 아들이며 양왕의 동생인
왕자대로서 감에 봉했기 때문에 감소공이라 한다. 소昭는 그의 시호이다. 감甘은 현재의 하남성 낙양시의 남쪽이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좌전·희공5년』의
수지首止의 회맹에 대한 주석을 참조하라.
▣惠后將立之,未及而卒. 昭公奔齊: 『좌전·희공12년』의
주석을 참조.
▣王復之: 『좌전·희공22년』을
참조.
▣又通於隗氏: 외씨는 적인 출신의 왕후(狄后)이다.
▣王替隗氏: 체替는 지위에서 폐하다.
▣頹叔·桃子曰: “我實使狄,狄其怨我.” 遂奉大叔,以狄師攻王: 왕인지의 『술문』: “그 다음
문구에 비로소 적의 군사가 주나라를 정벌했다는 언급이 있기 때문에 여기의 왕을 공격한 것(攻王)은 ‘狄師’가 아니다. 적사 두
글자는 아랫글 때문에 잘못 끼어 든 것이다. ‘遂奉大叔以攻王’으로 쓰는 것이 옳다. 퇴숙과
도자는 먼저 대숙을 받들고 반란을 일으켜 그를 왕으로 삼으려 했다. 그런데 국인이 왕을 도와 이루지
못하자 이 해에 다시 적인이 군사를 이끌고 주나라를 정벌하여 대숙을 세웠던 것일 뿐이다.”
▣王御士將禦之: 어사御士는 왕을 호위하는 군사들이다. 『좌전』에
모두 네 차례 보인다. 『좌전·양공22년』의 초왕 남의 아들
기질弃疾이 초왕의 어사가 되었다는 기사가 있고, 『좌전·양공30년』에 단공자 건기愆期가 영왕의 어사가 되었다는 기사가 있다. 즉 어사는 다수 공경대부의 자제들이 임명된다. 『좌전·양공22년』의 주석과 왕인지의 『술문』을 함께 참고하라.
▣王曰: “先后其謂我何?: 선후는 그의 모친 혜후를 말한다.
▣寧使諸侯圖之.” 王遂出,及坎欿: 감감坎欿은 현재의 하남성 공현鞏縣의 동남쪽이다.
▣國人納之: 주석 없음.
▣秋,頹叔·桃子奉大叔以狄師伐周, 大敗周師,獲周公忌父·原伯·毛伯·富辰: 「주어중」: “17년(원래는 18년이라고 되어 있는데 왕인지의 설을 따라 고쳤다), 왕이 적후를
폐출했다. 이 때문에 적인이 쳐들어와 담백을 주살했다. 그러자
부진은 ‘과거 왕에게 간언을 했었지만 이를 받아들이지 않아 이런 지경에 이르렀다. 만약 내가 나서지
않는다면 왕은 내가 원망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라고 말하며 무리를 이끌고 나가 싸우다가 죽었다.”
▣王出適鄭,處于氾: 범氾의 음은 범凡이다. 현재의 하남성 양성현襄城縣의 남쪽이다. 양왕이 일찍이 이곳에 망명했었기 때문에 양성이라고 이름지었다.
▣大叔以隗氏居于溫: 온溫은 하남성 온현溫縣의 서남쪽이다. 『좌전·은공11년』의 주석을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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