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무자의 귀국 (춘추좌전.6.13.2.)

나라가 진 사회士會 중용한 사실을 우려했다. 여름, 육경이 제부諸浮에 모였다. 조선자가 말했다. “수회隨會(사회)는 진에 머물고 있고, 가계賈季(호야고)의 땅에 있습니다. 그들로 인해 곤경이 닥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중항환자中行桓子(순림보)가 말했다. “가계를 복권하길 청합니다. 그는 외교에 능하고 또 부친 호언의 옛 공로도 있습니다.” 극성자成子(극결)가 말했다. “가계는 반란을 일으켰고 (6.6.6.) 또 죄도 크므로 수회를 복귀시키는 것보다 못합니다. 그는 자신을 낮출 줄 알고 염치가 있으며, 성격이 부드러워 윗사람을 범하지 않습니다. 그가 가진 지혜는 충분히 쓸 만하고 또한 지은 죄도 없습니다.

진나라는 이에 위수여魏壽餘에게 그의 식읍 위에서 반란을 일으킨 척 가장해 사회를 유인하게 했다. 위수여의 가족을 도성으로 잡아들였다가 야밤에 풀어주었다. 위수여가 자진해서 진에 귀의하기를 청하자 강공이 이를 허락했다. 그는 조정에서 사회의 발을 넌지시 밟아 눈치를 주었다. 강공이 황하의 서쪽에 군사를 주둔시켰는데, 읍이 건너 동편에 있었기 때문이다.

수여가 말했다. “황하의 동쪽 출신이라면 위읍의 관리들과 협상할 수 있을 것이니 제가 그와 먼저 가기를 청합니다.

강공이 사회를 보내려 하자, 그가 사양했다. “진인은 범이나 늑대와 같습니다. 만약 저들이 배신하면 신은 죽고 처자식은 여기서 죽임을 당할 것이니 군주께 이로움이 없습니다. 후회할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강공이 말했다. “만약 저들이 배신했다고, 그대의 처자식을 돌려보내지 않는다면 황하의 신이 벌을 내릴 것이다!” 이에 사회가 떠났다.

이때 요조繞朝가 사회에게 채찍을 선물로 주며 말했다. “그대는 이 나라에 인물이 없다고 생각하지 말라. 내 의견을 따르지 않았을 따름이다.” 사회가 강을 건너자 위읍 사람들은 환호성을 내지르며 돌아갔다. 진나라는 약속대로 사회의 가족을 보내주었다. 그 중 진나라에 남은 후손들은 유씨劉氏가 되었다


원문

人患之用士會六卿相見於諸浮. 趙宣子: 隨會賈季難日至矣若之何?中行桓子: 請復賈季能外事且由舊勳.成子: 賈季且罪大不如隨會. 能賤而有柔而不犯; 其知足使也. 且無罪.

乃使魏壽餘叛者以誘士會. 執其帑於使夜逸. 請自歸于秦伯許之. 士會之足於朝. 秦伯師于西人在東壽餘: 請東人之能與夫二三有司言者吾與之先.使士會. 士會辭曰: , 虎狼也. 若背其言臣死·子爲戮無益於君不可悔也.秦伯: 若背其言所不歸爾帑者有如!乃行. 繞朝贈之以策: 子無謂無人吾謀適不用也.旣濟人譟而還. 人歸其帑. 其處者爲劉氏.


관련 주석

人患之用士會六卿相見於諸浮: 공영달의 『소』: “여섯 명의 경은 조정에 아침 저녁으로 모여 있다. 그런데 특별히 ‘제부에서 만났다’고 말한 것을 보면 그들끼리 은밀히 논의를 하고 누설되지 않게 한 것이다. 그래서 야외로 나가 사람들을 격리한 채 은밀히 논의했다. 제부는 성 밖의 근처이다.

趙宣子: 선자는 조돈이다.

隨會: 수회隨會는 곧 사회士會이다. 『좌전·희공28년』의 주석에 자세하다.

賈季: 가계는 적으로 도망쳤다. 『좌전·문공6년』을 참조.

難日至矣若之何?中行桓子: 두예: “중항환자는 순림보이다. 희공 28년에 처음으로 중항의 장수가 되었기 때문에 이를 씨로 삼았다.

請復賈季能外事: 공영달의 『소』: “가계는 본래 적나라 사람이므로 충분히 외교를 담당할 수 있었다.

且由舊勳.: . 구훈이란 그의 부친 호언이 문공에게 큰 공을 세웠던 일을 말한다.

成子: 성자는 극결이다.

賈季: , 그의 사람됨이 난을 일으키는 것을 좋아함을 말한다. 문공6년 사람을 시켜 공자락을 모셔와 즉위시키려고 했던 일 등이다.

且罪大: 두예: “양처보를 죽였기 때문이다.

不如隨會. 能賤而有柔而不犯: 은 조동사로 쓰여 두 구절에 모두 관련된다. 소보의 『좌휴』는 능자는 윗구에 속하여 “不如隨會”을 한 구로 본다. 능을 재능으로 해석한 것이지만 옳지 않은듯하다. 고염무는 『보정』에서 “『전』의 앞의 말 ‘能外事’를 볼 때, 두 개의 ‘능’자는 서로 비교되어야 한다.”고 반박한다. 그의 주장이 옳다. 유월의 『평의』는 또 “능과 내 고자에서 통한다. 능천이란 비천한 신분을 감내하다(耐賤)와 같다.”는 등의 설명을 하는데 역시 믿을만하지 못하다. 사회는 본래 사위의 손자로서 그 가문이 본래 귀족이므로 신분이 천하지 않다. 내천이라고 말할 수 없다.

其知足使也: 는 지혜의 뜻.

且無罪.: 주석 없음.

乃使魏壽餘叛者: 대해서는 『좌전·환공3년』의 기사에 보인다. 『좌전·민공원년』의 “진 헌공이 이군二軍을 동원하여 위나라를 멸하고, 필만에게 위 땅을 하사했다.”는 기사를 보면, 위수여魏壽餘는 필만의 후손이다. 공영달의 『소』: “위주 필만의 후손으로 위의 적장자(世適)이다. 수여는 위읍의 주인으로 주의 가까운 친척이다.

以誘士會. 執其帑於使夜逸: 위수여가 거짓으로 반란을 일으킨 척했고, 진나라 역시 그의 가족들을 잡아들이는 체하고선 밤에 도망가도록 놓아주었다.

請自歸于: 위수여가 진으로 도망하여 자신의 위읍과 그 신민을 함께 진에 귀부할 수 있도록 요청한 것.

秦伯許之: 두예: “그의 읍을 받아들이는 것을 허락한 것이다.” 마왕퇴 3호묘에서 출토된 백서 중 『춘추사어春秋事語』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진 헌공이 수회(사회)를 데리고 오려 했다. 위주여를 불러 그 같은 요청을 했더니, 군주께서 저를 잡아 가두라는 거짓 명을 내리십시오. 그럼 저는 수갑을 잘라내고 □□□□□□ 효조가 말했다. ‘위주여가 진나라로 온 까닭은 아마 수회를 □□ 하려는 목적일 것입니다. 군주께선 허락하지 마소서.’ 주여는 과연 수회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효조는 수회에게 □ 주면서 내가 그대에게 주는 선물이다라고 말했다. 진나라에 □□□가 없다고 생각하지 말게. 실로 내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 왕이 듣건대 (이하 소실된 글자가 매우 많다.) 두 사람은 뒷일을 두려워하여 효조를 위험에 빠뜨릴 모략을 세웠다. □□회는 첩자를 시켜 효조를 참소하게 했다. ‘그는 위주여의 계략을 알고 있었고 저를 진나라로 보내려 했습니다.’ 진나라 대부는 그의 말을 믿었고 군주는 효조를 죽였다.” 이 단락은 대체로 『좌전』과 유사하지만 진 헌공 때의 일이 아니라 영공 때의 일이다. 효조가 죽임을 당한 사건 역시 『좌전』에는 보이지 않는다.

士會之足於朝: 말을 건네기가 불편하여 슬그머니 그의 발을 밟아 뜻을 드러낸 것이다.

춘추좌전 지도 - 양진


秦伯師于西: 진과 진은 이때 황하를 경계로 했다. 고동고의 『대사표』팔상에 설명이 자세하다. 진은 황하의 서쪽에서 군사를 이끌고 위읍을 취하기 위해 출동하려 했다.

人在東: 위읍은 황하의 동쪽에 있기 때문이다.

壽餘: 請東人之能與夫二三有司言者吾與之先.: 이것이 사회를 유인하는 계책의 관건이 되는 부분이다. “동인”이란 진나라 사람을 가리킨다. 진이 진의 동쪽에 있기 때문이다. 二三有司 위읍의 신민들이다. 에 머물고 있는 진나라 사람으로서 능히 위읍의 관리들과 담판할 수 있는 이는 사회를 제외하고 다른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사회라고 꼭 짚어 말하지 않은 까닭은 진에서 의심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與之先 수여와 함께 그 사람(사회)이 황하를 먼저 건넌다는 것으로서 진의 땅으로 감이다.

使士會: 진 강공이 그 임무를 사회에게 맡겼다.

士會辭曰: , 虎狼也. 若背其言臣死·子爲戮無益於君不可悔也.: 사회는 이미 위수여의 뜻을 알아챘지만 그가 진으로 돌아간 후 남겨진 처자들이 진에서 살륙당할 수 있으므로 이 말을 하여 자신은 떠날 의사가 없음을 보인 것이다.

秦伯: 若背其言: 만약 진나라가 약속을 배신하면의 뜻이다.

所不歸爾帑者有如!: 앞에서 사회가 “처와 자식이 주륙을 당한다”라고 말했고, 여기서 진 강공은 “歸爾帑”라고 답한 것을 보면, 처자식을 의미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탕을 자식으로만 보는 것은 온전히 뜻을 다한 것이 아니다.

乃行. 繞朝贈之以策: 요조繞朝의 대부이다. 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책서를 말하니 즉 간책에서의 책이다. 또 다른 하나는 말채찍으로 편책鞭策 책이다. 복건은 전자의 뜻으로 풀이했고, 두예는 후자의 뜻으로 풀이했다. 유협의 『문심조롱·서화경』에 “춘추시대 예방이 빈번하여 서간을 휴대한 사신들의 왕래가 빈번해졌다. 요조는 사회에게 책서를 주었고, 정나라의 자가는 조돈에게 서한을 보냈다.”는 구절이 있다. 유협은 복건의 주장을 따른 것이다.

: 子無謂無人吾謀適不用也.: 『좌전』에 따르면, 요조는 이미 진나라의 계략을 알아채고 사회가 동쪽으로 가는 것을 저지했지만 진 강공이 그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한비자·설난편』: “그러므로 요조의 말은 지극히 당연했다. 그는 진에게는 성인이었지만 진나라에서 죽임을 당했다.” 요조는 이 사건 때문에 죽음을 당했다. 마왕퇴3호 묘에서 출토된 『춘추사어』를 보면 “군주가 요조를 죽였다.”고 쓰여 있다. 한비의 말이 근거없는 얘기가 아니다.

旣濟: 황하를 건너 동쪽으로 갔다.

人譟而還: 위인이란 수여 등을 말한다. 군중이 크게 환호하는 것을 조 한다. 크게 환호하며 돌아갔다는 것은 계략이 성공하여 사회를 얻은 것을 기뻐함이다.

人歸其帑: 진 강공은 그가 약속한 말을 실천했다.

其處者爲劉氏: 사회의 자손 중 진나라로 돌아가지 않고 남은 이들이 유씨가 되었다는 말이다. 류를 씨로 삼은 까닭은 사회가 요의 후손이었기 때문이다. 『좌전·소공29년』에 “도당씨의 세력이 쇠퇴해진 후 그 후손 중에 유루劉累라는 이가 있었다.”는 말이 있다. 즉 사회는 유루의 후손이기 때문에 루의 성을 회복했다. 『후한서·가규전』에는 가규가 장제에게 올린 상소에, “오경을 가지고는 도참圖讖 모두 증명할 수 없는데 유씨가 요의 후손이라는 점은 『좌씨』에서 홀로 분명히 밝혀주고 있습니다.”라는 문구가 있는데, 이것을 가리킨 말이다. 범엽은 이에 대해 “가규는 견강부회가 심하여 그 분야에서 이름이 높았다.”고 평하고 있다. 공영달은 『소』에서 “앞뒤 문맥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 문장 하나는 다른 것과는 다르다. 이 구절은 본지本旨가 아닌것으로 심히 의심된다. 이 문구에 대해 주석을 삽입하는 것은 혹 세상을 미혹시킬 수 있다.”고 평하고 있다. 이 주장이 나온 후 후대인들이 수 많은 견강부회한 설명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이 문구는 본래부터 있었던 것이 분명하고 동한 시대 사람들이 덧붙인 것은 아니다. 공영달의 주장은 신뢰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첫째, 『좌전·양공24년』의 사개 말과 『좌전·소공29년』의 채묵蔡墨 대화 등을 보면, 모두 범씨를 요의 후손이며 유루의 후예라고 말하고 있으므로 이 문구에 대해 재론할 필요가 없다. 둘째, 『한서·휴홍전眭弘傳』의 “한나라 왕실은 요의 후손이다”라는 말은 역시 『좌전』의 주장을 채용한 것이다. 휴홍은 무제와 소제 때의 인물이기 때문에 즉 서한시대의 『좌전』에도 역시 이 문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셋째, 『한서·고제기찬』에서 유향의 『송고조』를 인용하여, “한나라 왕실의 본계는 당 황제()로부터 비롯되었다. 주나라에 복속하여 진나라에서 유씨가 되었다.”는 설명이 있는데, 여기서 “진나라에서 유씨가 되었다”는 말은 바로 『좌전』의 이 문구를 채용한 것이다. 즉 유향이 본 『좌전』에도 역시 이 문구가 있었던 것이다. 넷째, 『한서·고제기찬』에서 또 “한 고조가 즉위하여 사사관祠祀官을 설치했는데, ·진·양·형 지역에 무당을 두었다.”고 말하는데, 주석에서 응소의 주장을 인용하여, “선조들이 살았던 나라에 사당을 설치하고 무당으로 축문하여 널리 신령들의 뜻을 구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또 문영의 주장을 인용하여, “범씨는 대대로 진나라에서 출사했기 때문에 사사에 진나라 무당이 있었다. 범회(사회)의 서자들이 진 그대로 머물러 유씨가 되었기 때문에 진나라의 무당도 있었다.”고 말한다. 이를 보면 한나라 초기 진과 진의 무당이 유방의 선조들에게 축원하였고, 이는 즉 이 문구가 후대인들이 덧붙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다섯째, 『한서·서전敍傳』에서 반표의 『왕명론』을 인용하여, “이런 이유로 유씨는 요의 제사를 잇고, 그 씨족의 세계가 『춘추』에 드러나게 된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에 대해 안사고는 “사회가 진나라로 돌아간 후 진에 그대로 남은 이들이 유씨가 되었다.”고 말한다. 반표는 가규보다 연배가 위이다. 『좌전』의 이 문구를 채용한 것을 보면 역시 이 문구가 본래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반고의 『고제찬』에서도 “노 문공 때 진으로 도망갔다가 후에 진으로 다시 돌아왔는데 진에 남은 이들이 유씨가 되었다.”고 말한 것이다. 여섯째, 『좌전·정공5년』의 “부개왕夫槩王 돌아와 스스로 즉위하여 왕과 싸우다가 패했다. 초나라로 도망친 후 당개씨堂谿氏 되었다.” 당계씨의 후손은 그 존재가 세상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이 말에 대해서 의심을 둘 필요가 없다. 즉 본문의 “진에 남은 이들이 유씨가 되었다.”는 말은 “초나라로 도망친 후 당계씨가 되었다”는 말과 유사하다. 그러므로 굳이 공영달처럼 “앞뒤 문맥을 보건대 그 문장이 다른 것과 유사하지 않다”고 주장할 필요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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