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중국의 윤월 (춘추좌전.6.1.2.)

이때 윤삼월을 두었는데 예가 아니다. 선왕의 올바른 시는 다음과 같다. 역의 시작을 동지에 두고, 정삭의 달을 중으로 삼고, 남는 날은 세밑에 귀속시킨다. (先王之正時也履端於始正於中歸餘於終) 역의 시작을 동지에 두면 시의 순서가 어긋나지 않고; 정삭의 달을 중으로 삼으면 백성들이 계절에 의심을 품지 않으며; 남는 날을 세밑에 귀속시키면 일에 어긋남이 없다.


원문

於是閏三月非禮也. 先王之正時也履端於始正於歸餘於終. 履端於始序則不愆; 正於中民則不惑; 歸餘於終事則不悖.


관련 주석

於是閏三月非禮也: 강영의 『군경보의』의 “고대의 역은 모두 큰 달과 작은 달을 안배하는 평삭平朔을 채용했으므로 일월은 모두 평행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삭일(초하루)을 실수로 앞에 두거나 뒤에 두어 일식이 삭일에 있지 않은 경우가 있다. 문공 원년의 ‘2월 계해일에 일식이 있었다.’는 기사에 대해 강급과 『대연』·『수시』등 여러 역법에서 모두 이는 3월 계해 삭일에 있었던 일로 추산한다. 『춘추』에서 ‘2월 계해’라고만 쓰고 삭을 언급하지 않은 것은 계해일을 2월 그믐으로 오인하여 갑자일을 3월 삭일로 본 것이다. 3월 갑자일이 삭일이라면 4월에 당연히 정사일이 있게 되므로 『춘추』에서 ‘4월 정사일에 희공의 장례를 치렀다.’라고 쓴 것이다. 이 해는 본래 윤삼월이 없는데 좌씨는 일식이 반드시 삭에 있어야 하기 때문에 2월 계해일을 삭일이라고 생각했고, 그렇다면 4월에는 정사일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므로 3월과 4월 사이에 반드시 윤월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 연유에서 ‘於是閏三月非禮也라고 말한 것이다.’”

先王之正時也履端於始正於中歸餘於終: 이 문구에 대한 과거 해석은 매우 다양하다. 여기서는 강영의 『군경보의』에 근거하여 해설한다. 리단어시履端於始”에서 “시”는 동지이다. 세시와 절기를 추산하는 방법은 동지를 시작점으로 한다. 그래서 그 뒤에 “순서가 어긋나지 않는다”라고 말하였다. 『어람』29에서 장영서臧榮緖의 『진서』에서 웅원熊遠이 논평하길 “履端元日”이라고 하고, 또 유천庾闡의 「양도부陽都賦」를 인용하여 “역은 정월 초하루에서 시작하여, 음과 양이 갈마드는데, 동지에서 시작하고 남는 날은 세밑에 귀속하며 삼조가 시를 알린다(歲惟元辰, 陰陽代紀, 履端·歸餘, 三朝告始)”라고 하여 이단을 세수를 정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거정어중正於中은 하·은·주, 삼대에는 서로 다른 정월 초하루(正朔)를 가졌는데 정삭이 있는 달을 정월이라 한다. 두예는 “중기를 가지고 월을 바르게 한다(擧中氣以正月)”라고 풀이했는데 옳지 않다. 고대에는 단지 계·폐·분·지 8절기가 있었을 뿐이다. 계칩(경칩) 24절기는 후대에 성립된 것이다. 동지를 한 해의 시작점으로 삼고, 윤여 즉 남는 날을 마지막으로 돌린다. 그러므로 정삭의 달(정월)을 중으로 삼는다고 말한 것이다. 주나라는 비록 자월(하력 11)을 정삭으로 삼았지만 “履端於始”의 앞에 먼저 선왕의 정시正時를 언급하고 있으므로 이는 삼대를 모두 총괄하여 말한 것이다. 심동의 『소소』는 “擧正於中은 천체의 운행과 해의 그림자, 매월 남쪽 하늘에 남중하는 성수(中星)를 춘분과 추분(), 동지와 하지()의 기준으로 삼아 네 개의 중월을 만든 것이다. 동지가 정북에 있으므로 하지는 정남이고, 춘분과 추분은 정동과 정서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 소재한 위치를 가리켜 정으로 삼았다고 한다.”고 설명한다. 이 주장 역시 통한다. 대체로 고대인이 역을 추산할 때 두 가지 방법이 있었는데, 하나는 천상을 관찰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해의 그림자를 측정하는 방법이다. 천상을 관찰하는 것은 때에 따라 구름에 의해 가려지는 경우가 있어 정확하지 않다. 해의 그림자를 측정하는 것 역시 때에 따라 그림자나 비가 올 수 있어 그 길이의 길고 짧음을 측정하는데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처음에는 부정확한 것이 많다. 후에 경험이 누적되어 해와 달 그리고 별자리 운행의 대략을 알게 되었고 여기에 다시 관측기술의 경험이 더해져 갈수록 정밀해졌다. 『맹자·이루하』의 “그 근원을 궁구하면 천대의 일이라도 앉아서 헤아리고 확정할 수 있다.”는 자신감 있는 말은 전국시대에 이르러서야 볼만한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

귀여어종歸餘於終 3년 혹은 2년마다 윤월을 두는데 항상 윤월을 해의 마지막에 배치했다는 뜻이다. 본문에선 윤삼월을 두었으므로 올바른 예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선왕의 바른 역에 한해 말한 것으로서 『춘추』와 『좌전』의 날짜로 미루어 계산해 보면 윤월이 반드시 세밑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춘추』와 『좌전』에서 윤월이 기록된 사례는 9차례이다. 그중 『좌전·양공9년』의 윤월은 오자이므로 이를 제외하면 8차례이다. 예를 들어 『좌전·소공20년』의 “윤월 무진일에 선강을 죽였다.”는 기사의 앞에 있는 『좌전』은 8월의 기사이고, 뒤의 기사는 10월이므로 윤월은 당연히 그 사이에 위치하므로 세밑이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외 『춘추·소공원년』의 “6월 정사일 주자 화가 죽었다.”는 기사의 다음에 “11월 기유일 초나라 군주 미가 죽었다.”는 기사를 보면 6월에 정사일에 있었기 때문에 11월에는 기유일이 있을 수 없다. 즉 그 중간에 윤월이 있어야만 한다. 또 『춘추·소공28년』의 “여름 4월 병술일, 정나라 군주 녕이 죽었다.”는 기사의 다음에 “가을 7월 계사일 등나라 군주 년이 죽었다.”는 기사가 있다. 4월과 7월 사이에는 110여일이 있으므로 4월에 병술일이 있었다면 7월에 어떻게 계사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 사이에도 역시 윤월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런 예는 너무 많다. 옛 사람들은 윤월을 큰 일로 생각하는 경우가 드물었기 때문에 『춘추』와 『좌전』에서 윤월을 기록하는 사례가 적었고 반드시 세밑에 두지도 않았다. 『좌전』의 작자는 단지 옛 법에 의거해서 말했을 뿐이다. 소위 옛법이란 오늘날 출토된 복사를 연구한 결과로서 보면 은대 조갑 이전을 가리킨다. 복사를 살펴보면, 무정에서 조갑에 이르는 시기에는 세밑에 윤월을 두고 이를 13월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제을과 제신 시대의 복사를 보면 13월이란 명칭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순마다 치른 점복의 기록으로 추론해 보면 그 시기는 모두 년중에 윤월을 두고 있었다. 서주 초기 역시 년중에 윤월을 두었는데, 왕국유의 『생패사패고生覇死覇考』와 오기창의 『금문의년표金文疑年表』에서 이에 대해 분명히 밝히고 있다. 『주금문존周金文存』에 수록된 견준遣尊·수준受尊·목기 등에 비록 “十又三月”이란 말이 있지만 이는 실제로는 윤12월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으므로 이를 근거로 해서 세밑에 항상 윤월을 두었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履端於始序則不愆; 正於中民則不惑; 歸餘於終事則不悖: 『사기·역서』에서도 이 문구가 실려 있고 약간의 차이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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