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 목왕 균나라 정벌 (춘추좌전.6.11.1.)
문공 11년 봄, 초 목왕이 균麇나라를 정벌했다. 성대심成大心이 방저防渚(호북성 방현房縣)에서 균나라 군대에 무찔렀다. 반숭潘崇이 재차 균나라를 정벌하여 양혈鍚穴(섬서성 백하현白河縣의 동쪽)까지 이르렀다.
원문
十一年春,楚子伐麇. 成大心敗麇師於防渚. 潘崇復伐麇,至于鍚穴.
관련 주석
▣十一年春,楚子伐麇: 이 단락은 전년의 “궐맥의 회합에서 균의
군주가 도망쳐 돌아갔다.”는 단락과 이어진다.
▣成大心敗麇師於防渚: 성대심成大心은 성득신의 아들이다. 자는 손백孫伯으로 『좌전·희공28년』의 기사에 보인다. 방저防渚는 균나라 땅인데, 현
호북성 방현房縣이다.
▣潘崇復伐麇: 반숭潘崇은 『좌전·문공원년』의 기사를 참조.
▣至于鍚穴: 양鍚의 음은 양羊이다. 『석문』: “혹 석錫자로 쓰기도 한다.” 『교감기』: “『한서·지리지』에서 양현鍚縣은 한중군漢中郡에 속하며 응소는 ‘음은 양陽’이라고 설명한다. 안사고는 ‘이곳은 즉 『춘추』에서 말한 양혈이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후한서·군국지』에서는 ‘면양沔陽에는 철鐵이, 안양安陽에는 주석(錫석)이 산출되는데, 춘추시대에는 석혈이라고 불렀다.’고 설명한다.” 즉 “석”으로 쓰는 것이 옳다는 주장이다. 전기의 『찰기』: “이 글자에 대해서 과거 서로 다른 주장이 있고 어느 것이 옳은지 확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석경』은 판본보다 앞서고, 반고와 응소 역시 『후한지』보다 앞선다. 육덕명의 『석문』역시 “양”자를 정자로 보았고, “석”자를 혹 다른 판본에선 이 글자를 쓴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석경』을 따르는 것이 옳다.”
양혈鍚穴은 당연히 균나라의 도성으로, 『청일통지』에선 현재의 섬서성 백하현白河縣의 동쪽이라 하고, 『방여기요』는 운현隕縣의 서북쪽 180리 떨어진 곳이라고 말하는데, 모두 『수경·한수주』에 근거한 설명이다. 두 곳에서 말한 위치는 대략 비슷하다. 초나라 군사가 이곳까지 정벌을 왔지만 당시는 아직 균을 멸망시키지는 못했는데, 『좌전·문공16년』의 “용나라가 여러 만족을 이끌고 초나라에 반란을 일으키자 균나라 역시 백복百濮을 이끌고서 선選 땅을 취했다.”는 기사로서 입증할 수 있다. 이때(문공16년)에 초가 용나라를 멸했는데, 아마 균 역시 홀로 무사했을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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