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아彭衙 전투 (춘추좌전.6.2.1.)

문공 2년 봄, 의 맹명시孟明視가 군사를 거느리고 진을 정벌하여 효의 패전을 보복하려 했다. 2, 양공이 이를 방어했는데 선차거가 중군을 지휘했고 조최가 그를 보좌했다. 왕관무지王官無地가 어융, 호국거狐鞫居가 융우였다. 갑자일(16), 팽아彭衙(섬서성 백수현白水縣 동북쪽 40. 나라)에서 진 군과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 은 진군에 대해 “은혜를 갚으러 온 군대”라고 비아냥거렸다. (5.33.3.) 효산에서 싸울 때 진의 양홍梁弘이 어융이었고 래구萊駒가 융우였다. 싸움이 끝난 다음날, 양공이 진의 포로를 포박하고 래구를 시켜 과로 그를 참수하게 했다. 포로가 비명을 지르자 래구가 놀라 창을 놓쳤다. 낭심이 떨어진 과를 집어 포로를 참수하고 래구를 끌고서 양공의 전차를 뒤따랐다. 바로 낭심이 융우가 되었다

의 전쟁(5.33.6.)에서 선진이 낭심을 융우에서 폐하고 속간백續簡伯을 융우로 삼자 낭심은 분노했다그의 벗이 말했다. “왜 그를 죽이지 않는가?” “내가 아직 죽을 자리를 얻지 못했네.” “내가 자네와 함께 난을 일으키겠네.” “『주지周志』에 이런 말이 있네. ‘용맹을 믿고 상사를 해치면 명당明堂에 오르지 못한다.’ 죽더라도 의롭지 못하면 그것은 용기가 아닐세.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을 용이라 하네. 나는 용맹으로 융우가 되었으니 용맹하지 못해 축출되었다면 그 또한 마땅한 일이네. 내 스스로 상사가 나를 알지 못해 쫓아낸 것이라면 그럴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반란을 일으킨다면 그는 나라는 인간을 잘 알고 있었다는 얘기가 되니 그대는 잠시 기다려보게.” 팽아彭衙의 전쟁에서 진을 펼친 후 낭심은 부하들을 이끌고 적진으로 쳐들어가 전사하였다. 진군이 그 뒤를 따라 크게 승리를 거두었다.

군자는 말한다. “이때 낭심의 행동은 군자라 할 만하다. 『시』(『소아·교언』)에 ‘군자가 분노하니 순식간에 혼란이 그쳤다.’ 또 ‘왕이 격분하니 군대가 정돈되었다.(『대아·황의』)라고 말하였다. 그는 분노했지만 반란 대신 종군했으니 군자라 말할 수 있다.

패전에도 불구하고 진 목공은 오히려 맹명을 중용했다. 맹명은 더욱 국정에 힘쓰고 백성에게 두텁게 은혜를 베풀었다. 의 조성자趙成子(조최)가 여러 대부에게 말했다. “진군이 또다시 쳐들어오면 그때는 반드시 피해야 합니다. 두려워할 줄 알고 더욱 덕을 쌓고 있으니 당해낼 수 없습니다. 『시』에 ‘네 선조의 덕을 유념하여 덕을 닦아라.’라고 말했습니다. 맹명은 이를 염두에 두었고, 덕을 생각하고 나태하지 않으니 어찌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


원문

二年春孟明視帥師伐以報之役. 二月晉侯禦之先且居將中軍趙衰佐之. 王官無地御戎狐鞫居爲右. 甲子師戰于彭衙師敗績. 人謂拜賜之師.

戰于晉梁弘御戎萊駒爲右. 戰之明日晉襄公使萊駒以戈斬之. 囚呼萊駒失戈取戈以斬囚禽之以從公乘. 遂以爲右. 之役先軫黜之而立續簡伯. . 其友曰: 盍死之?: 吾未獲死所.其友曰: 吾與女爲難.: “『周志有之: 勇則害上不登於明堂.死而不義非勇也. 共用之謂勇. 吾以勇求右無勇而黜亦其所也. 謂上不我知黜而宜乃知我矣. 子姑待之.彭衙, 旣陳以其屬馳死焉. 師從之大敗

君子謂於是乎君子. : 君子如怒亂庶.又曰: 王赫斯怒爰整其旅.怒不作亂而以從師可謂君子矣.

秦伯猶用孟明. 孟明增修國政重施於民. 趙成子言於諸大夫曰: 師又至將必辟之. 懼而增德不可當也. : 毋念爾祖聿修厥德.孟明念之矣. 念德不怠其可敵乎?


관련 주석

二年春王二月甲子: 정월 초나흘 신묘일이 동지였고, 건자이다. 갑자일은 7일이다.

晉侯師戰于彭衙: 팽아彭衙나라 읍이다. 「진본기」의 “무공원년 팽희씨彭戲氏 정벌했다.”는 기사에 대해 『정의』는 팽희는 “융 호칭이다. 동주팽아同州彭의 옛성이 이곳이다.”라고 설명한다. 즉 현재의 섬서성 백수현白水縣 동북쪽 40 떨어진 곳에 있는 팽아보彭衙堡인데, 한나라 때의 아현衙縣 옛성에 해당한다. 왕국유의 『귀방곤오험윤고鬼方昆吾玁狁考』에서 『혜갑반兮甲盤』의 “왕이 처음으로 □□(팽아)에서 험윤을 정벌했다(王初格伐嚴允()())[1]”는 문구에서 □□ 팽아와 대음으로 동일한 지역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춘추좌전 지도 - 양진


師敗績: 주석 없음.

 

二年春秦孟明視帥師伐以報之役: 이 장은 작년 말의 『좌전』과 함께 읽어야 옳다.

二月晉侯禦之先且居將中軍趙衰佐之: 조최가 극진郤溱 대신했다.

王官無地御戎: 왕관王官은 지명으로 『좌전·문공3년』에 보인다. 그 지역을 채읍으로 가진 사람일 수도 있다. 그는 양홍梁弘 대신하여 어융이 되었다.

狐鞫居爲右: 호국거狐鞫居는 다음 글에 나온 속간백續簡伯이다. 『좌전·문공6년』에선 그를 속국거續鞫居라고도 쓰는데 속은 그의 채읍으로, 간백은 그의 자로 여겨진다. 음은 국이다.

甲子 師戰于彭衙: 팽아는 진나라 땅이다. 다음(6.2.8)에 보이는 “광 팽아의 땅을 빼앗아 귀환했다.”는 기사로 입증할 수 있다. 그런데 진이 진 침략을 방어했다고 말하면서 진 땅이 아닌 진 땅에서 싸움을 벌인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진나라가 자국 밖에서 싸울 의도로 먼저 진 국경 안으로 쳐들어가 주객을 전도시킬 의도가 전혀 없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師敗績: 「진본기」는 “목공이 이 때 다시 맹명시 등을 보내 진을 정벌하게 하였고 팽아에서 싸움이 벌어졌다. 진이 형세가 불리하여 군사를 되돌렸다.”고 기록하여 패전이라고 하지 않아 『좌전』과는 다르다.

人謂拜賜之師: 『좌전·희공33년』에 맹명은 양처보에게 “3년 안에 다시 군사를 이끌고 군주의 은혜에 보답하겠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런 까닭에 진나라가 이를 두고 조소한 것이다.

戰于晉梁弘御戎萊駒爲右. 戰之明日晉襄公使萊駒以戈斬之. 囚呼萊駒失戈取戈以斬囚: 음은 심이다.

禽之以從公乘: 래구를 잡아 양공의 수레를 따라 갔다.

遂以爲右. 之役: 전투는 희공 33년에 있었다.

先軫黜之而立續簡伯: 공영달의 『소』: “어융과 거우는 평소 정해진 사람이 있지만 전투에 임해서는 반드시 다시 선발하였다. 의 전투에서 융우를 누구로 쓸지 점을 쳐 경정慶鄭이 길하게 나왔던 것이 그 예다. 효의 전투 후 낭심이 융우가 되었다. 기의 전투에선 싸움에 앞서 융우를 선발했는데 선진이 낭심을 뽑지 않았다.” 속간백은 기의 전투에서 융우가 되었고 이번 전투에서도 계속 융우가 되었다.

. 其友曰: 盍死之?: 何不 합음이다.

: 吾未獲死所.其友曰: 吾與女爲難.: . 즉 낭심을 위해 변란을 일으킨다는 뜻. 난은 거성으로 반란을 일으켜 함께 선진을 죽이자는 의미이다.

: 周志有之: 두예: 『주지周志』는 주나라의 책이다.” 고서에 지를 이름 붙인 것이 다수 있다. 「초어상」의 “『고지故志』를 가르쳐 흥망성쇠의 원인을 알게 하고 이를 통해 경계하고 두려워하게 하였다.”에 대해 위소는 “『고지』는 전대의 흥망성쇠에 대해 기록한 책”이라고 주석하고 있다. 문공 6년과 성공 15년의 『좌전』에 『전지前志』가 언급되는데 이 책이 「초어」에서 말한 『고지』가 아닌가 싶다. 『좌전·성공4년』의 『사일지지史佚之志』는 사일이 지은 책이다. 양공 4년과 25, 소공 원년과 3년 그리고 12, 애공 18년의 『좌전』과 「진어9」에선 모두 『』를 인용하고 있다. 희공 28, 선공 12, 소공 21년 등의 『좌전』에선 모두 『군지軍志』를 인용하고 있다. 모두 지를 책의 이름을 삼은 사례이다. 태강太康10(기원후 289) 의 현령 노무기盧無忌는 『제태공여망비齊太公呂望碑』에 다음과 같이 썼다. “태강 2, 현의 서쪽에 무덤을 도굴한 도적이 있었고, 그 때 죽간으로 된 책을 얻었다. (그때 발견된)『주지周志』에 쓰여 있기를” 등이다. 즉 급총서에 『주지』가 있었다. 주희조朱希祖 『급총서고書考』에선 『주지』는 『주서』라고 주장하며 인용한 한 구절이 현재의 『주서·대광편大匡篇』에 보인다.

勇則害上不登於明堂.: 이 문구는 『일주서·대광편』에 “勇如, 則不登於明堂.”으로 쓰여 있다. 가설연사로 쓰였다. 勇則害上”은 “勇如”과 같다. 명당과 태묘 그리고 대학은 같은 곳이다. 손성연은 『고금관실유제고古今官室遺制考』에서 “명당은 예를 거행하는 궁인데 예를 마치면 다시 비워둔다. 그러므로 종사할 때는 청묘淸廟라 하고, 재숙할 때는 노침路寢이라 하며, 사를 교육할 때는 태학大學이라 하고, 나라의 원로를 봉양할 때는 상이라 하는데, 궁궐의 동쪽에 위치한 후에는 동서東序라고 불렸고, 활쏘기 연습을 할 때는 반궁泮宮이라 한다. (즉 모두 명당의 다른 이름들이다) 대향과 전쟁 후 적의 귀를 바치는 헌괵 등 큰 예는 모두 이 궁에서 베풀어진다(明堂, 蓋行禮之宮, 禮畢則虛其位, 故宗祀則曰淸廟, 齋宿則曰路寢, 敎士則曰大學, 養老則曰庠, 始自東則曰東序, 習射則曰泮宮. 大鄕·獻馘諸大禮皆於此宮).”고 설명한다. 그의 주장이 매우 사실에 근접한다.

死而不義非勇也: 선진을 죽인다면 필시 자신도 죽는다. 이것은 불의한 죽음이니 용이라 할 수 없다.

共用之謂勇: 공은 공 같다. 공용은 나라를 위한 일에 죽는 것.

吾以勇求右無勇而黜亦其所也: 역기소는 마땅하다(得宜)와 같다. 뜻은 난을 일으켜 선진을 죽인다면 이것은 용맹이 아니다. 그러므로 선진이 나를 축출한 일은 올바른 판단이 되는 것이다.

謂上不我知: 은 여기서 선진을 가리킨다.

黜而宜乃知我矣. 子姑待之.彭衙: 팽아의 싸움에 이르러서.

旣陳以其屬馳死焉. 師從之大敗: 주석 없음.

君子謂於是乎君子. : 君子如怒亂庶.: 『시·소아·교언巧言』의 시구이다. 모『전』은 ‘천은 신속하게, 는 그치다의 뜻”이라고 풀이했고, 정현의 『전』은 “임금이 무고하게 참소하는 사람에게 화를 내어 책망했다면 이런 난리는 아마도 빨리 그쳤을 것(君子見讒人如怒責之, 則此亂庶幾可疾止也).”이라고 풀이한다. 이것이 본래의 뜻이고 『좌전』의 작자는 다만 글자에만 입각해서 뜻을 취한 것이다.

又曰: 王赫斯怒爰整其旅.: 『시·대아·황의皇矣』의 시구이다. 혁사赫斯는 혁연赫然 같고 분노한 모습이다. 『공양전·선공6년』의 “즉 굳은 시체였다(則赫然死人也)”를 보면, 본문에선 혁사를 다른 곳에선 혁연을 사용했다. 비록 뜻은 같지 않지만 어휘는 서로 유사하다. 은 언 용법이 같고 於是 뜻이다.

怒不作亂而以從師可謂君子矣.: 주석 없음.

秦伯猶用孟明: 『사기·진본기』: “목공이 맹명 등을 다시 더욱 후하게 대우했다.

孟明增修國政重施於民. 趙成子言於諸大夫曰: 조성자는 조최를 말한다.

師又至將必辟之. 懼而增德不可當也. : 毋念爾祖聿修厥德.: 『시·대아·문왕』의 시구이다. 현재의 『시』에는 “念爾祖”라고 쓰고 있다. 와 무 같다. 두예는 “무념은 생각하다()이다.”라고 풀이한다. 와 율은 모두 발성사로서 뜻이 없다. 즉 선조를 생각하여 덕을 베푼다는 뜻.

孟明念之矣. 念德不怠其可敵乎?: 용법으로 쓰였다. 두예: “다음해 진이 진을 정벌하는 배경이 되는 『전』이다.” 두예의 해석으로 미루어 보면 “진 목공이 오히려 맹명을 중용했다”는 등의 64글자는 그 자체 하나의 『전』을 이룬다. 그러나 문맥을 보면 팽아의 싸움과 이어서 하나의 『전』으로 보는 것이 옳고, 훗날 모든 일의 전후를 안 상태에서 미루어 보면 다음해 왕관의 전투의 장본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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