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中國’이란 명칭

왕얼민에 따르면 선진 시대(진나라 통일 이전) 문헌에 중국이란 명칭은 172번 등장하는데 그 의미는 수도, 국경의 안, 제하 영역, 중앙 지역에 위치한 나라로 구분할 수 있다고 한다. (「중국이라는 명칭의 기원 탐구 및 그 근대적 해석」, 『중국문화부흥월간』, 5, 8. 1972)

 

현재의 중국중화인민공화국의 줄임말이다. 중국공산당의 작명 수완은 참 대단했다. 공산주의/사회주의와 두드러지게 민족주의를 강조한 중화라는 말은 부조화의 극치인 데도 이 둘을 나란히 섞었고, 게다가 우리 같은 아시아권에선 긴 국명을 줄이면 중국이라는 애매하면서도 굉장히 포괄적인 의미를 가진 이름으로 변신한다. 이런 트랜스포머가 또 없다




 

일반적인 생각과 달리 중국이란 단어는 기원전 12세기부터 등장한다. 애초에는 특정 지역, 그것도 넓은 지역이 아닌 단 하나의 도시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그 도시는 낙양, 즉 지금의 허난성 뤄양이다. 기원전 12세기에는 낙읍, 춘추시대까지 성주로 불리던 그 도시다. 1963년 섬서성 보계현에서 출토된 성왕 시대에 제작된 하준何尊의 명문에 처음으로 중국이란 말이 등장한다.


 

왕이 처음으로 성주로 천도하고 무왕의 예를 따라 천실에서 제사를 거행했다. … 왕이 종묘에서 소자에게 말하였다. “과거 네 부친이 문왕을 잘 보필하였기에 문왕이 상제에게서 대명을 받으실 수 있었다. 무왕이 대읍상大邑商을 멸한 후 상제에게 정중하게 고하였다. ‘저는 장차 이곳 중국中國에 궁을 건설하고 이곳에서 민을 다스릴 것입니다.’ …


하준何尊의 명문


 

이 명문에서 후대 우리가 상 혹은 은으로 부르는 나라를 대읍상으로 지칭하는 반면 중국은 성주라는 도시를 특정하고 있다. 상나라 스타일로 말하면 중국대읍주에 속한 신도시다. 『서경』이나 『일주서』 등에서 성주를 중국으로 명명한 까닭을 밝히고 있는데 주나라의 본래 근거지가 다소 서쪽에 치우친 것에 비해 성주는 무왕과 성왕이 정복한 지역을 포함해 그 중심에 해당하고 사방에서 조공을 바치는 거리로 따져도 공평하게 가운데에 위치했기 때문에 중국으로 명명했다고 설명한다.

 

애초 이렇게 성주라는 특정 지역을 가리키던 중국이 차츰 그 이름이 가진 매력 때문에 추상적인 의미의 세계의 중심으로 발전한다. M. 엘리아데는 중심이 가장 분명하게 신성한 구역이며 절대적인 존재물의 지대라고 말한 바 있고, 고대인에게 북극성은 비할 데 없이 깜깜한 배경 속에서 유독 빛을 내며 마치 움직이지 않는 중심처럼 하늘의 모든 별들이 이를 축으로 삼아 회전하고 것으로 관찰되었기 때문에 중심이란 더 없이 높은 지위라는 아주 매력적인 대상이었다. 그래서 공자도 위정자의 정치를 비유할 때 북극성을 끌어들였다.

 

장공 31년 여름 6, 제 환공이 우리나라로 와서 융에게서 획득한 전리품을 바쳤는데 예가 아니다. 범례에 따르면, 제후들이 사방 이민족에 전공을 세우면 왕에게 헌첩하고 왕은 이로써 이민족에 경종을 울린다. 그러나 중원의 나라간 전쟁에서는 헌첩하지 않는다(中國則否). ( 8.2.9.) 또 제후들은 획득한 포로를 서로 주고받지 않는다.

 

춘추 시대로 접어들면서 중국의 의미는 애초의 의미와 확연히 달라진다. 성주라는 특정 지역이 아닌 문화권을 의미하게 된다. 장공 대의 중원은 주나라의 예가 통용되는 문화권을 가리킨다. 여기에는 남쪽의 초나라 등은 포함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중원 연맹이 초나라와 싸워 이기면 천자가 본래의 중국즉 성주에서 패자로부터 헌첩을 받는 의식을 거행하지만 제나라 등 중원에 속한 나라들을 왕명을 받들어 진나라 등이 토벌할 때는 그렇지 않다. 춘추 시대 중반까지 중국의 범위에는 초나라, 서쪽의 진나라, 오나라, 월나라 등은 포함되지 않는다. 싸우면서 정이 든다더니 이들은 춘추 시대의 빈번한 전쟁과 외교 교류를 통해 전국시대가 되면 어느새 모두 중국의 일원이 된다. 블랙홀 같은 중국이란 문화권의 특색이다.

 

중국이라는 말은 사방과 대구를 이룬다. 그러므로 여기서 중국은 곧 경사를 가리키고 사방제하諸夏를 말한다. 만약 중국사이四夷와 비교한다면 제하 역시 중국이라 말할 수 있다. (모시정의) 한나라 모형.

 



사방으로 통일 중국의 무력을 떨쳤던 한나라 시대 모형이란 학자의 『모시정의』에선 중국이 가리키는 범위는 좁은 의미의 제하와 넓은 의미의 사이와 비교해서 이전 시대보다 더 명확하게 구분하되 그 지리적 범위는 북쪽으로는 만리장성까지 확대된다.

 

사마천은 그의 기념비적인 저술 『사기』에서 중국의 역사를 씨줄과 날줄로 구분하고 서로 엮었는데, 상고시대부터 그의 당대 한나라 무제까지 역사의 정통을 본기로 구분했다. 상고시대의 오제, 하나라, 상나라, 주나라, 진나라, 한나라가 바로 그 정통의 맥을 잇는다. 춘추 시대 이민족 서융으로 취급받았던 진나라가 당당하게 정통의 지위를 차지하고, 중원연맹의 패자 진나라와 제나라는 방계일 뿐으로 그들은 제후들의 역사를 기록한 세가에 편입된다. 북방의 이민족 흉노, 남쪽의 이민족 남월, 그리고 동쪽의 이민족 조선은 개인의 일대기를 담은 열전에 편입한다. 이웃 중국의 포용성이란 참으로 대단하지 않은가. 몽골 원나라의 지배가 끝난 후에도 중국은 명나라 정부 주도로 관찬 사서 원나라 역사(元史)를 저술하여 태연하게 몽골의 역사도 자신의 것으로 포용하고 수용한다. ‘과거 이 땅에 있었던 모든 역사는 중국의 역사. 이런 때 중국이란 용어의 애매모호함과 포괄적 성격은 큰 문제가 된다. 중국은 국가의 이름일 수도 있고, 문화권을 가리키는 명칭일 수도 있으며, 3000년이라는 역사를 가진 살아 움직이는 블랙홀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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