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복전쟁 전야 - 진 문공, 위나라 정벌 (춘추좌전.5.28.1.)

희공 28년 봄, 진 문공이 조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위나라에 길을 빌리려고 했다. 위나라는 이를 거절했다. 문공은 길을 돌아 남하南河에서 황하를 건너 조나라를 침략하고 위나라를 정벌했다. ( 5.27.4.) 정월 9일 무신일, 오록五鹿(위나라) 점령했다. 2, 진의 극곡이 사망했다. 원진原軫(선진)이 중군의 장수가 되었고, 원진 대신 서신胥臣이 하군의 부장이 되었다. 그들의 덕을 높이 산 것이다. 진 문공과 제 효공이 염우歛盂(하남성 복양현濮陽縣 동남쪽. 위나라)에서 동맹을 맺었다. 위 성공이 동맹을 청했지만 진나라는 거절했다. 위 성공은 초나라와 동맹하려 했지만 국인들이 이를 원치 않았고, 오히려 성공을 축출하여 진나라에 해명하였다. 성공은 양우襄牛(하남성 범현范縣. 위나라)로 도망쳤다.


원문 (5.28.1.) 

二十八年春晉侯將伐假道于. 人弗許. , 南河[1]·. 正月戊申五鹿. 二月. 原軫將中軍胥臣佐下軍上德也. 晉侯·齊侯盟于歛盂. 衛侯請盟人弗許. 衛侯欲與國人不欲故出其君以說于. 衛侯出居于襄牛.



[1] “남하南河”는 완각본에는 “하남河南”으로 쓰여 있다. 여기서는 『당석경』과 금택문고본을 따라 글자를 수정했다.


관련 주석

二十八年春晉侯將伐假道于: 이것은 작년 『좌전』의 호언의 계책을 사용한 것이다. 조나라의 도읍은 현재의 산동성 정도현定陶縣이고, 위나라의 도읍은 초구楚丘로서 현재의 하남성 골현滑縣 동쪽 60리 떨어진 곳이다. 즉 조나라는 위나라의 동쪽에 위치하기 때문에 진나라가 길을 빌리려고 한 것이다.

人弗許. , 南河: “남하南河”는 완각본에는 “하남河南”으로 쓰여 있다. 여기서는 『당석경』과 금택문고본을 따라 글자를 수정했다. 고대 황하는 동북쪽으로 흘러갔다. 만약 위나라가 선뜻 길을 빌려줬다면 위나라 경내에서 황하를 건넜겠지만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군대는 남쪽으로 돌아가서 남하에서 황하를 건너 다시 동쪽으로 향했다. 남하南河는 곧 남진南津인데, 극진棘津·제진濟津·석진현石濟津으로도 불린다. 하남성 기현淇縣 남쪽이며 연진현延津縣 북쪽이다. 이 곳 황하 물길은 이미 없어졌다.

춘추좌전 지도 - 춘추시대 열국


·: 『사기·위세가』: “성공 3, 진나라가 위나라 영토를 지나 송나라를 구원하려고 했지만 성공이 이를 수락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진은 남하를 건너 송나라의 구원에 나섰다.” 『좌전』과 같다.

正月戊申: 무신일은 9일이다.

五鹿: 『좌전·희공23년』에서 진 문공이 “오록에서 출발하여 도중에 야인에게 음식을 구걸하였더니 그는 중이에게 흙덩이를 주었다.”는 기사가 있다. 지금 오록 땅을 취하여 그 징조에 상응하고 있다. 『상군서·상형편賞刑篇』과 『여씨춘추·간선편簡選篇 그리고 『한비자·외저설우상外儲說右上』에서는 모두 문공의 이 전쟁을 “위나라 농지의 이랑을 [서쪽에 위치한 진나라 병거가 지나치기 용이하게] 동쪽 방향으로 내게 했다(之畝)”라고 말하는데, 『좌전』에선 이 내용을 싣지 않고 있다. 나머지 상세한 내용은 『좌전·성공2년』의 주석을 참조.

二月. 原軫將中軍: 원진原軫은 곧 선진先軫이다. 은 그의 식읍이다. 진나라 사람들은 그의 식읍을 씨로 삼은 경우가 많았다.

胥臣佐下軍上德也: 선진이 하군의 부장에서 단계를 건너 뛰어 중군을 지휘하게 되었기 때문에 덕있는 사람을 높인 것(尙德)이라고 말한 것이다. 곧 상 뜻이다. 서신은 하군의 부장이 되어 선진의 빈 자리를 채웠다. 「진어4: “오록을 취한 것은 선진의 계략 때문이다. 극곡이 죽자 선진에게 그 자리를 대신하게 하였다. 서신은 하군의 부장이 되었다.

晉侯·齊侯盟于歛盂: 고음은 렴이다. 염우歛盂는 위나라 땅으로 현재의 하남성 복양현濮陽縣 동남쪽이다.

衛侯請盟人弗許. 衛侯欲與國人不欲故出其君以說于: 과 같다. 또한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해명하다의 뜻으로 봐도 통한다. 「위세가」는 진나라가 일찍이 “위나라 군사를 징발하려 하자 대부들은 이를 수락하려고 했지만 성공이 싫어했다.”고 적고 있는데, 이것은 『좌전』에 없는 내용이다. 길을 빌리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군사를 징발하고자 했을까? 태사공의 이 주장은 믿기 어렵다. 「진세가」는 『좌전』과 같은 내용이다.

衛侯出居于襄牛: 양우襄牛는 위나라 땅이다. 출거出居는 반드시 그 나라 국경을 넘는 것은 아니다. 국도가 혼란에 빠져 거처를 옮겼을 때 모두 이라고 말할 수 있고 반드시 나라 밖으로 나가야만 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좌전·환공3년』에 예나라 군주 만 거처했는데, 위는 당시 예의 국경 안에 있는 곳이었다. 『좌전·애공20년』에 오나라 공자 경기慶忌 애에 출거하였는데 그 곳은 오나라 읍이었다는 사실로 증명할 수 있다. 강영의 『고실』은 양우襄牛가 현재의 산동성 범현范縣 경내로서 위나라의 동도라고 주장한다. 「위세가」: “대부 원훤이 성공을 공격하자 성공이 출분하였다.” 『좌전』의 다음에 나오는 “위후가 원훤 시켜 숙무를 모시고 맹약을 받들게 하였다”는 기사를 보면 즉 원훤은 성공을 공격한 거사에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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