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 장왕, 용나라를 멸하다 (춘추좌전.6.16.4)

초나라에 큰 기근이 들었다. 이 초의 서남쪽을 정벌해 부산阜山(호북성 방현房縣 남쪽) 이르러 대림大林(형문형荊門縣 서북쪽)에 주둔했다. 다시 동남쪽을 공격하여 양구陽丘(미상)에 이르렀고 자지訾枝(지강현枝江縣)를 침략했다

나라(호북성 죽산현竹山縣 상용上庸 옛성)가 여러 만족들을 이끌고 초나라에 반기를 들고, 나라는 백복百濮을 선(지강현枝江縣)에 집결시켜 초나라를 공격하려 했다. 이때 신과 식 북문은 굳게 닫혀 열리지 않았다

초나라 사람들이 판고阪高(양양현襄陽縣 서쪽)로 천도하려 했다. 위가蔿賈가 말했다. “불가하다. 우리가 갈 수 있다면 적도 쫓아올 수 있다. 용나라를 정벌하는 편이 낫다. 균과 백복은 우리가 기근 때문에 군을 동원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공격한 것이다. 만약 우리가 군사를 내면 필경 두려워 돌아갈 것이다. 백복은 서로 흩어져 거주하므로 각자의 읍으로 도망칠 것이고 서로 도와줄 겨를이 있겠는가?” 이에 군사를 동원했다. 보름이 지나자 백복의 무리들은 곧 흩어져 귀환했다

초군은 려(호북성 남장현南漳縣의 동쪽 50)에서 출발했고, 창고를 열어 상하가 똑같은 밥을 지어먹었다. 구서句澨(균현均縣 폐치 서쪽)에 주둔했다. 집려戢黎에게 용나라를 침략하게 하고 용나라의 방성方城에 도착했다. 용인들이 초군을 밀어내고 자양창子揚窗을 사로잡았다. 사흘 후 그가 도망쳐와서 말했다. “용나라 군사가 많고 여러 만족들이 집결해 있다. 돌아가 다시 대군을 동원하고 왕의 군사까지 동원해 합류해야 진격할 수 있다.” 

사숙師叔이 말했다. “그럴 수 없다. 잠시 상황을 보고 또 적과 교전하여 저들이 교만해지게 만들자. 적은 교만해지고 아군은 분노한다. 그렇게 되면 이길 수 있다. 선군 분모가 형습陘隰을 굴복시킨 방법이다.” 초군은 용나라와 마주쳤고, 7번 만나 모두 도망쳤다. 여러 만족 중 비, 그리고의 만족만 초나라를 추격했다.  

용나라 사람들이 말했다. “초나라는 싸울 만한 상대가 못 된다.” 이어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았다. 초 장왕이 역참을 타고 신속하게 임품臨品(균현均縣)에 주둔하고 있던 군대와 합류했고, 군대를 두 부대로 나눠 자월은 석계石溪에서, 자패子貝는 인 부근에서 출발하여 용나라를 정벌했다. 나라와 파나라가 초군을 따랐고 여러 만족들도 장왕을 따라 동맹하고 이어 용나라를 멸망시켰다.


원문

大饑伐其西南至于阜山師于大林. 又伐其東南至於陽丘以侵訾枝.

人帥群蠻以叛人率百濮聚於將伐. 於是·之北門不.

人謀徙於阪高. 蔿賈: 不可. 我能往寇亦能往不如伐. 百濮謂我饑不能師故伐我也. 若我出師必懼而歸. 百濮離居將各走其邑誰暇謀人?乃出師. 旬有五日百濮乃罷.

以往振廩同食. 次于句澨. 使廬戢黎庸方城. 人逐之子揚窗. 三宿而逸: 師衆群蠻聚焉不如復大師且起王卒合而後進.師叔: 不可. 姑又與之遇以驕之. 彼驕我怒而後可克先君所以服陘隰.又與之遇七遇皆北··人實逐之.

人曰: 不足與戰矣.遂不設備. 楚子乘馹會師于臨品分爲二隊子越石溪子貝以伐. ·人從. 群蠻從楚子遂滅.


관련 주석

··人滅: 는 『좌전·환공9년』의 주석을 참조. 은 나라 이름이다. 『상서·목서』에 따르면, 주 무왕을 도와 은을 정벌할 때 용나라의 병사가 참전했다. 건국된 지 오래된 나라이다. 「초세가」: “주 이왕 당시 웅거가 장강과 한수 사이에 거주하는 백성의 마음을 얻어 용나라를 정벌했다.” 용국이 초나라에 속한 소국이 된 것은 이 때부터이다. 고동고의 『대사표』에 따르면, 호북성 죽산현竹山縣 동서10리에 걸쳐 상용上庸 옛성이 있는데 이 곳이 옛 용국의 땅이다.

 

춘추좌전 지도 - 용나라의 반란

大饑伐其西南: 두예: “융은 산이山夷이다.

至于阜山: 부산阜山은 초나라 읍. 『독사방여기요』에 따르면, 현 호북성 방현房縣 남쪽 150리 떨어진 곳이다.

師于大林: 초나라 군사는 대림에서 적을 방어하려 했다. 대림大林은 초나라 읍이고 『휘찬』에 따르면, 현 호북성 형문형荊門縣 서북쪽이다.

又伐其東南: 초나라가 방어하려하자 적은 다시 동남쪽으로 향했다.

至於陽丘: 양구陽丘는 초나라 땅으로서 소재지는 미상.

以侵訾枝: 의 음은 자이다. 자지訾枝, 초나라 읍으로 고동고의 『대사표』는 현 호북성 종상현鍾祥縣 부근이라 하고, 심흠한의 『보주』는 현 지강현枝江縣이라고 주장한다. “동남쪽을 정벌했다”는 기사로 보면 심흠한의 주장이 옳은 것 같다.

人帥群蠻以叛: 군만에 대해 고사기의 『지명고략』은 『후한서·남만전』을 근거로 하여, 현 호남성 원릉현沅陵縣 지강현芷江縣 일대라고 말하지만, 그 곳과 용국은 거리가 매우 멀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의심건대 본문의 군만은 호북성 경내에 산재해 있던 부락들로서 용국과 비교적 거리가 가까운 곳이어야 용나라가 그들을 통솔할 수 있었을 것이다.

人率百濮聚於: 균에 대해선 『좌전·문공10년』을 참조. 은 종족의 이름이다. 『상서·목서』를 보면 은을 정벌할 때 무왕의 지지하는 무리 중 복인이 있다. 『위공전』: “복은 장강과 한수의 남쪽에 있다.” 이에 해당한다. 다음에 “백복이 어지럽게 흩어져 각각의 읍으로 도주했다”는 기사가 있다. 그래서 공영달의 『소』는 두예의 『석례』를 인용하여 “복이는 통솔하는 군장이 없다. 각각 읍락으로 취락을 이루었기 때문에 ‘백복’이라고 불렀다.”고 설명한다. 대체로 복인 부족은 하나로 통일되어 있지 않고 흩어진 거처가 매우 넓기 때문에 백복이라 한다. 현 호북성 석수현石首縣 부근이다. 『예기·왕제』의 “북” 역시 “복”이다. 현 운남과 사천의 파이擺彝 역시 고대에 “복”과 “북”의 음전이다. 심흠한의 『지명보주』와 고사기의 『지명고략』의 설명을 참조하라. 병신부계작丙申父癸爵 “□”자가 있는데 지명으로서 곽말약의 『금문속고·계□고』에선 백복의 복으로 추정하고 있다. 주장이 나름대로 가치가 있어 기록해 둔다. 은 초나라 땅이고 『휘찬』에 근거하면, 호북성 지강현枝江縣 부근이다.

將伐. 於是·之北門不: 『좌전·은공원년』의 주석을 참조. 은 『좌전·은공11년』의 주석을 참조. 신과 식은 초의 북쪽인데 중원의 나라와 접하는 요지이다. 그 북문은 섣불리 열 수 없는데 중원의 여러 나라들 때문이다.

人謀徙於阪高: 두예는 판고阪高가 초나라의 험지라고 말한다. 『휘찬』에 따르면, 판고는 현 호북성 양양현襄陽縣 서쪽이고, 홍량길의 『고』와 심흠한의 『보주』는 현 당양현當陽縣 동북쪽 20리 떨어진 장판에 해당한다고 한다.

蔿賈: 위가에 대해선 『좌전·희공27년』의 주석을 참조.

不可. 我能往寇亦能往不如伐. 百濮謂我饑不能師故伐我也. 若我出師必懼而歸. 百濮離居: 이거離居는 흩어져 거주하다.

將各走其邑誰暇謀人?: 초가 용나라를 치면 백복은 모두 퇴각할 것.

乃出師. 旬有五日百濮乃罷: 백복은 초나라가 군사를 낸 것을 보고 과연 위가의 말처럼 각각 군사를 거두어 돌아갔다.

以往 振廩同食: 『좌전·문공14년』의 주석을 참조. 초나라가 영에서 군사를 일으켜 용국을 치려면 필히 영을 경유하여 려에 이르고 식량을 스스로 휴대해야 한다. 려를 지난 후에는 도달한 지역의 식량 창고를 열어 군사들에게 먹였다. 은 『주서·극은편』의 “녹대의 재화를 풀었다(鹿臺之財)”에서의 “진”과 같은 뜻으로서 나눔 뜻이다. 두예는 “진은 열다 뜻”으로 풀이하는데 역시 통한다. 또 두예는 “동식은 위 아래 구분없이 같은 음식을 먹었다”고 풀이한다.

次于句澨: 두예는 구서句澨를 초나라의 서쪽 지역으로 여긴다. 『휘찬』은 서구를 현 호북성 균현均縣 폐치 서쪽이라고 말한다.

使廬戢黎庸方城: 용나라의 방성은 초의 방성과는 별개의 곳이다. 고사기의 『지명고략』: “현재 죽산현竹山縣 동서 15리에 걸쳐 방성이 있다. 산 위는 평탄하고 사방은 험준하다. 산의 남쪽에는 10여 리에 걸쳐 성벽이 있으니 춘추시대의 ‘용나라의 방성’이다.

人逐之子揚窗: 두예: “창은 집려戢黎 관리이다.” 자양은 그 관리의 자이고, 창은 이름이다. 이런 예는 문공 9년과 선공 4년에서 투초를 “자월초子越椒”라고 부른 것과 같다.

三宿而逸: 師衆群蠻聚焉不如復大師: 복대사는 초나라의 군사를 크게 다시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두예는 “구서에 있는 군대로 돌아갔다”고 설명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구서에 있던 군사는 이미 용국을 정벌하고 돌아왔으니 어찌 이 전투에 투입되지 않았겠는가? 또 다음에 나오는 반왕의 말을 보면 자양의 이 말은 단지 려집여에게만 한 말이 아니고 초의 여러 장수들에게 한 말이다.

且起王卒: 가능한 초의 모든 군사를 동원해야 한다는 뜻.

合而後進.師叔: 『좌전·선공12년』에 근거하면 사숙은 초나라 대부 반왕임을 알 수 있다.

不可. 姑又與之遇以驕之. 彼驕我怒而後可克先君所以服陘隰.: 「초세가」: “소오가 6년만에 죽고, 아들 웅순이 즉위했다. 이가 곧 분모이다. 분모는 즉위 후 17년만에 죽었다. 분모의 동생 웅통이 분모의 아들을 시해하고 대신 즉위했는데 그가 곧 초 무왕이다.” 그러므로 분모는 초 무왕의 형이다. 두예는 “초 무왕의 부친”이라고 했는데 그 근거를 알 수 없다. 양옥승의 『사기지의』: “『한()자·화씨편』에 ‘여왕이 죽고 무왕이 즉위했다’, 「외저설좌상」역시 ‘초려왕’이라고 말하고, 『초사』의 동방삭 「칠간」에서 ‘초나라 여왕과 무왕의 불찰 속에 강족은 양쪽에서 착 충분히 마칠 수 있었다.’라는 기사를 보면 분모의 시호는 여왕이다.” 공영달의 『소』: “형습을 복속시켰다는 말을 보면, 즉 형습은 본래 타국이었는데 분모 때에 비로소 복속시킨 것이다.” 고동고의 『대사표』: “형주부荊州府의 동쪽에는 산과 계곡이 많고 험하여 그걸 가지고 이름을 지었다.

又與之遇七遇皆北: 두예: “군사가 패주하는 것을 ‘배’라 한다.” 배는 배 같다. 몸을 돌려 도망감이다. 패배를 가장하여 적을 교만하게 한 것.

··人實逐之: “조”는 “숙”으로 쓰기도 한다. 음은 주 혹은 유이다. 두예: “비와 조 그리고 어는 용나라의 세 읍이다.” 마종연의 『보주』: “『수경·강수』에 ‘다시 동쪽으로 어복현을 지나 옛성의 남쪽을 지나친다’는 기사에 대해 역도원은 ‘옛 어나라이다’라고 주석하고 있다. 이는 어나라가 여러 만이 중 하나이지 용나라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유소는 파군 어복에 대해 ‘옛 용나라이다’라고 말하는데, 이 주장은 원개의 잘못된 설명을 따른 것이다.” 마종연의 주장이 옳다. 비와 조 그리고 어는 모두 용나라가 동원한 이른바 “군만”에 속하는 부락들이다. 두예의 주장은 신뢰하기 어렵다. 와 조의 소재지는 현재로선 알 수 없다. 는 현 사천성 봉절현奉節縣 동쪽 5리 떨어진 곳이다.

人曰: 不足與戰矣.遂不設備. 楚子乘馹: 음은 일이다. 역참마.

會師于臨品: 임품臨品『휘찬』에서 현 호북성 균현均縣 부근이라 한다.

分爲二隊: 두예: “대이다. 양쪽에서 공격했다.” 대자에는 대오의 뜻이 있다. 『좌전』역시 그 뜻을 취했다. 양공 10년의 “왼쪽은 집고, 오른쪽은 창을 빼들고서 한 부대(一隊)를 구성했다”와 23년의 “제 군주가 진의 정벌에 나서 조가 땅을 취하고 두 부대(二隊)를 구성했다”는 기사 역시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대에는 굴(羨道선도)의 뜻도 있다. 『이아·석궁』의 “선은 굴이다(, 隊道也).” 『좌전』에선 이 경우 “수”를 쓴다. 양공 18년의 “숙사위가 큰 수레로 굴을 막았다(塞隧)”와 애공 13년의 “월나라 군주가 오나라를 칠 때 두 개의 길을 뚫었다(二隧)” 등이 그 예다. 두예의 주석은 이 두가지 뜻을 모두 혼용한 것 같다. 왕념손의 『광아소증』은 후자의 뜻을 썼다(立後一義).

子越石溪子貝以伐: 자월子越은 투초의 자이다. 석계石溪와 인『휘찬』에 근거하면, 모두 균현에 있고 용나라로 진입하는 길목이다.

·人從. 群蠻從楚子: 두예: “만족들이 초나라의 강함을 보았기 때문이다.

遂滅: 「초세가」: “장왕은 즉위 후 삼 년간 한 번도 명령을 내리는 일 없이 밤낮으로 향락을 즐겼다. 온 나라에 ‘내게 간언을 올리는 이는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명을 내렸다. 오거가 간언했다. 장왕은 좌측에 정희를 우측엔 월녀를 안고 북과 편종의 사이에 자리잡고 앉았다. 오거가 말했다. ‘수수께끼를 하나 내고자 합니다. 어떤 새가 언덕에 앉아 3년 동안 날지도 울지도 않으니 이 새는 어떤 새입니까?’ 장왕은 ‘3년을 날지 않았으니 한 번 날면 하늘을 뚫고 올라갈 것이고, 3년을 울지 않았으니 한 번 울면 천하를 놀래킬 것이다.’ 오거는 대답을 듣고 말했다. ‘소신은 물러나겠습니다. 왕의 뜻을 알겠습니다.’ 장왕의 향락은 수 개월 동안 더욱 심해졌다. 대부 소종이 들어와 간언했다. ‘내 명령을 듣지 못했는가?’ 왕이 물었다. ‘소신을 죽여 왕의 뜻이 분명해진다면 그것이 바로 소신의 뜻입니다.’ 그러자 장왕은 향락을 그치고 정치를 펴기 시작했는데 주살된 자가 수백이었고 등용된 자 역시 수백이었다. 오거와 소종을 등용하여 정치를 맡기니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이때 용나라를 멸망시킬 준비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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