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주의의 이데올로기 (중국이야기)

장면 1. 몽테스키외


영화 미션을 보면, 유럽에서 온 정복자들, 노예 상인들은 남미의 과라니 족을 인간의 말을 잘 따라하는 짐승으로 폄하한다. 인디오 그리고 아프리카 노예에 대한 이런 인식이 단지 우락부락한 군인들, 정복자들 만의 것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영화 '미션'


신은 영혼을, 특히 선량한 영혼을 저 새까만 육체속에 깃들이게 하였다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는다.” 이는 당대 유럽 최고의 지성 중의 한 사람이었던 몽테스키외(1689– 1755)가 아프리카 노예를 두고 한 말이다. 그는 더 나아가 우리가 그들을 인간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기독교도가 아니라는 의심이 생길 것이라고까지 말한다. (송병건, 『경제사』, 해남, 2012. 232쪽 재인용.)

 

장면 2. 대학자 정현


불모의 땅에 사는데 하늘이 그들을 천하여 여겨 버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기단을 쌓아 집을 지어 살지도 않고 남녀의 구별도 없다. … 가죽옷을 입고 털모자를 쓰며 짐승의 고기를 먹고 그 피를 마신다. … 어지러이 거주하니 마치 중원의 사슴과 같을 따름이다.” 기원전 1세기 한나라 소제 시대의 유학자가 중원 밖의 이민족을 묘사한 글이다. 소제는 무제의 막내 아들이고 8살이라는 어린 나이로 즉위했다. 이로부터 150여년 정도 지난 후한의 대학자 정현(서기 127– 200)은 심지어 이적의 사람들은 새와 짐승의 말을 안다(『주례의소』)고 주장하기도 했다.

 

장면 12 시대의 공통점은 서유럽과 중국이 당대의 대국으로 우뚝 선 시기의 인식이라는 점이다. 하나는 15세기 대항해/대발견 시대를 열어젖힌 서유럽이 세계 도처에서 승리를 거두고 있을 당시의 지식인의 인식이다. 다른 하나는 한 무제의 아들 소제 시대 벌어진 염철론에서 유학자를 대표한 현량과 서기 2세기 후한 시대 대학자 정현의 이민족에 대한 인식이다.

 

이들이 애초부터 자기 밖에 존재하는 세계를 그렇게 인식했던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그저 자기들과 다르다는 것을 인지했을 뿐이다. 언어가 다르고, 습관이 다르고, 종교도 다르다는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차이를 인식했을 뿐이다. 오히려 고대에서 중세 시대를 거치며 아시아 혹은 이슬람과 일진일퇴의 싸움을 거듭하면서 오히려 그들의 높은 수준의 학문과 문화를 동경하게 되었고 열심히 수입하기도 했던 이들이 서유럽이다. 르네상스도 저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지도 모른다. 진 시황제와 한 무제 이전의 중국의 이민족 인식은 어땠을까?

 

융이 동맹을 청했다. 가을, (산동성 조현曹縣)에서 결맹하고 재차 우호를 경신했다.

 

춘추좌전 지도 - 융


기원전 721년 노나라는 부근의 이민족 융과 회합을 개최하고 동맹을 맺었으며 우호를 갱신하고 있다. ‘결맹()’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춘추 시대의 결맹이란 두 나라의 군주가 각자의 군대를 거느리고 한 자리에 회합하여 의제를 토론하고 엄격한 기준에 의해 선발된 소를 희생으로 삼아 신령 앞에서 우호를 다짐하고 각자 이름으로 맹세하는 의례이다. 그리고 합의한 바의 내용을 세 부 만들어, 두 군주가 희생의 피를 나눠 마시고 약속한 바의 맹약서를 한 부는 희생 위에 올린 후 묻는다. 그리고 각자 한 부씩 가져간다. 이 기사에서 간과하면 안 되는 또 하나의 사실은 춘추시대 이민족은 중원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중원 국가들의 도성에서 멀지 않은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산동성의 노나라만 그런 것이 아니다. 패자 진나라도 심지어 주나라 천자의 나라 낙양 근처에도 여러 융의 나라가 있었다. 후대의 학자들이 이를 나라가 아닌 부족으로 인정했을 뿐이다. 이 역시 실상과 다르다. 일개 부족과 패자 및 중원의 국가가 무슨 이유로 동맹을 맺는가?


그런데도 문화는 달랐고 언어도 달랐다는 사실은 문헌을 통해 알 수 있다. 기원전 559년 진나라는 강융이 스파이 노릇을 하고 있다고 불신하고 그들과 단교하려 할 때 강융은 강력하게 항의했다. 즉 기원전 627년 효산 전쟁 이후로 귀국이 참전한 전쟁에 우리 강융을 비롯한 융들은 한번도 빠뜨리지 않고 참전해 온 동맹국이다. 우리를 간첩으로 의심하는데 우리 융들이 먹는 것, 입는 것이 중화 다르고 예물 역시 다르며 서로 말도 통하지 않으니 어떻게 내통할 수 있는가?라고 따졌다. 이에 할 말이 없어진 진은 융에게 사과하고 동맹을 지속했다.

 

서유럽이든 중국이든 애초에는 저들과 자신들 사이의 다름은 알았지만 어디까지나 이는 사회적 문화적이 차이였을 뿐이다. 그러나 무제 시대 중국처럼 북쪽으로 흉노를 완전히 몰아내고, 서쪽으로 장건의 우연한 지리적 발견으로 시야가 넓어지고, 남쪽으로 인도차이나 반도까지 진출하며 동쪽으로 한반도까지 진출하면서 자부심과 우월감에 빠진 이 중화는 올챙이 시절을 까먹고는 중화는 어느새 이데올로기로 변신하고 다름은 사회와 문화의 다름에서 가치와 도덕의 수준 차이로 격상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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