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都와 읍邑 - 만리장성의 나라, 도로를 건설하는 나라 (중국이야기)

 

나폴레옹 전쟁의 뒷수습을 위한 유럽의 열강들이 모였던 18149월의 비엔나, 메테르니히를 비롯한 유럽의 외교관들은 유럽의 정치질서를 나폴레옹 이전으로 돌리기 위해 많은 애를 기울였고 대부분 그들의 뜻대로 되었지만 한 가지 나폴레옹에 의해 공식적으로 사망 선고를 받은 신성로마제국, 키신저의 표현대로 절대 신성하지도 않았고 절대 제국도 아니었던그 애매모호한 존재는 역사 속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그리고 300여 개가 넘던 독일의 공국들은 39개로 축소되었다. 독일뿐 아니라 우리가 유럽에 여행을 가면 어디에서나 흔하게 눈에 띄는 중세 시대의 옛 성들은 이렇게 수많은 공국들이 오늘날의 독일과 이탈리아에 흩어져 자치도시로 존재했기 때문이다.


 

폭력으로 가득 찬 사회 분위기로 인하여 갖가지 위험에 시달리고 있던 개인에게 친족은 봉건시대 제1기를 통해서조차 충분하다고 할 만한 보호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었다. …… 사람들이 다른 유대 관계를 찾거나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도 바로 이것이었다.”(마르크 블로크, 봉건사회)


 

오스트리아 짤즈부르크성

폭력으로 가득 찬 사회, 친족에게만 기댈 수 없었던 사회는 마르크 블로크가 유럽의 봉건 시대의 태동을 묘사한 글이다. 로마 제국이 무너지고 게다가 샤를 마뉴까지 사라진 이후 유럽에는 민을 보호할 강력한 중앙정부가 사라졌다. 작은 영주, 큰 영주할 것 없이 모두 험지에 요새를 짓고 성을 쌓고 각자 생존에 골몰했다.

 

와 읍



뜻밖에 서주 시대(기원전 12세기 기원전 770)에는 수백 개가 넘는 중원의 열국은 도성조차 성벽이 없는 국가가 대부분이었다.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드물었다. 익숙한 공자의 나라 도 마찬가지. 중원의 국가에 성을 둘러싼 성벽이 급증하기 시작한 시기는 서주가 북방 이민족에게 쫓겨 낙양으로 천도한 이후다. 국가마다 활발한 축성이 진행된 것의 이유로는 두 가지를 꼽을 수 있다. 하나는 각자도생이다. 중세 유럽처럼 강력한 천자의 도성이 이민족에게 함락되었고, 그에겐 제후를 지켜줄 힘이 없어졌다. 다른 하나는 어쩌면 지금까지 성벽이 없었던 것은 천자의 법도에 의한 금기였을 것이다. 천자는 제후들이 다른 마음을 먹지 못하게 튼튼한 방어벽을 쌓는 것이 싫었기에 설사 부득이 성벽을 쌓더라도 일정한 제한을 두었다.

 

채중祭仲이 장공에게 아뢰었다. “도는 그 성이 백 치를 넘으면 나라()에 해가 됩니다. 선왕의 법도를 보면, 대도는 국도의 1/3을 넘지 않고, 중도는 1/5을 넘지 않으며, 소도는 1/9을 넘지 않습니다. 지금 (아우 공숙단에게 내준) 경읍은 법도에 맞지 않고 선왕의 제도도 아니니 장차 군주께서 감당하실 수 없을 것입니다.

 


중국 시안 장안성 성문과 성벽


이 기사는 주나라가 천도하고 대략 50년이 지난 어느 날 정나라에서 있었던 일을 소개하고 있다. 서주의 쇠락과 함께 주나라의 법 혹은 예가 이미 상당히 훼손되었음을 보여준다. 한 나라의 도성보다 큰 성벽을 가진 지방의 도시 - 이곳은 또 정나라의 국경의 요지 중의 하나였다 - 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좌전』에선 에 대해 군주의 종묘의 신주를 모신 곳은 ’, 그렇지 않은 곳은 이라고. 실상은 문헌의 설명과 부합하지 않는다. 대체로 모두 으로 쓰고, ‘란 어휘는 아예 잘 쓰지 않는다. 읍에 종을 덧붙여 군주나 대귀족의 근거지가 되는 지역은 종읍으로 쓸 뿐이다. 춘추시대의 패자 진나라의 군주는 곡옥이 바로 군주의 종읍이기에 새 군주가 즉위할 때 항상 곡옥의 종묘를 참배한다.


읍이란 어휘의 유래는 상나라 때부터 찾을 수 있다. 그들은 스스로를 읍상邑商’, 혹은 대읍상大邑商으로 불렀다. 그 시대에 읍은 곧 나라를 일컫는 말이었다. 나라를 일컫는 말이 주나라에 와서는 으로 변한다. 물론 전국시대 이전까지 중국은 영토국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 /대읍혹은 은 나라에서 가장 큰 도시를 가리키는 말이 된다. 춘추시대에도 이란 글자에는 이 자주 붙어 사용되는데 이 국인國人은 도성 안에 사는 사람들을 가리키는데 그들은 전쟁 시에 동원되는 전사이며 국정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도성 밖의 들판에 거주하며 농사에 종사하는 이들을 야인野人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생업에 종사할 뿐 전쟁에 동원되지 않는다. 국민 모두가 전쟁에 동원되는, 국민개병의 시대대는 전국시대에 가서야 가능하다.


로마 포로로마노 2018/


카이사르는 더 이상 로마 제국의 수도에 성벽은 필요 없다고 허물어버렸지만 서기 3세기 아우렐리아누스 황제는 더 이상 로마가 과거의 로마가 아님을 인식했기에 성을 이전보다 커 크고 견고하게 쌓았다. 밖으로 길을 낼 것인가, 성을 쌓아 안을 보호할 것인가는 그 나라의 현재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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