료蓼나라 (춘추좌전.6.5.4.)

겨울, 초나라의 공자섭公子燮이 료나라를 멸하였다. 장문중이 육나라와 료나라가 멸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말한다. “고요와 정견의 제사가 홀연히 끊겼구나. 덕정을 펼치지 않아 백성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원문

楚公子[1]. 臧文: 皋陶·庭堅不祀忽諸. 德之不建民之無援哀哉!



[1] 완각본에서는 “공”자가 탈락되어 있다. 여기서는 『당석경』과 금택문고본, 『송』본, 악본, 족리본을 따라 추가했다.


관련 주석

楚公子燮: 완각본에서는 “공”자가 탈락되어 있다. 여기서는 『당석경』과 금택문고본, 송본, 악본 그리고 족리본을 따라 추가했다. 의 음은 료이고 나라 이름이다. 다만 『좌전·환공11년』에 나온 “료”와는 다른 나라이다. 『좌전』에 근거하면, 이 료나라는 정견庭堅 후예이다. 『예기·방기坊記』와 『회남자·범론훈氾論訓』에선 모두 “양후陽侯 료후(「방기」는 “료”를 “무/”로 쓴다. 왕인지의 『술문』에서는 음이 비슷하여 가차한 것이라고 설명한다)를 죽이고 그의 부인을 빼앗았다.”고 전한다. 료는 바로 여기의 료나라이다. 현 하남성 고시현固始縣 동북쪽에 요성강蓼城岡 있는데 옛 료나라의 자리이다.

臧文公: 皋陶·庭堅不祀忽諸: 뒤의 여덟 글자는 한 구로 읽어야 한다. 옛 사람들은 두 구절로 끊어 읽었는데 옳지 않다. 이 문구는 皋陶·庭堅忽焉不祀라고 쓰는 것과 같다. 홀언을 홀제로 써서 끝의 (불사를) 도치한 것인데 옛 사람들은 그 뜻을 알지 못했다. 우창의 『향초교서』는 “홀제는 합음으로 우 같고 감탄사이다. 여기서는 ‘皋陶·庭堅不祀’가 한 구가 되고, 홀제는 아래의 구에 속하게 하여 뜻을 이룬다.”라고 설명하나 역시 신뢰할 수는 없다. 스웨덴의 한학자 칼그렌은 『좌전주석』에서 “『시·대아·황의』 ‘是節是忽’의 모『전』‘홀은 멸하다의 뜻이다(, 滅也).’란 설명을 인용하여 풀이하지만 그렇게 되면 “不祀”와 뜻이 중복되므로 취하지 않는다. 『좌전·문공18년』에 고양씨의 재자才子 8인이 있는데 그중 정견이 있고, 두예는 『한서·고금인표』에서 근거하여 “정견은 곧 고요의 자이다.”라고 풀이하여 그는 고요와 정견을 한 사람으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설은 믿기는 어렵다. 최술은 『하고신록夏考信錄』에서 이 주장에 대해 의심을 품고, (『상서』의) 「전」과 「모」에서 고요를 호칭한 말이 매우 많은데, 임금이 부를 때도, 동료 신하들이 부를 때도 또 사관이 호칭할 때도 모두 고요라고 했다. 후대의 시인이나 유자가 그를 호칭할 때도 역시 그러하다. 누구도 그를 정견이라 부른 사람이 없는데 무엇을 보고 정견이 고요라고 주장하는가?”라고 반박한다. 고요와 정견은 두 사람으로 보는 것이 옳다. 뇌학기의 『세본교집』에선 “고요는 소호씨 출신으로 그 후예로는 언성의 육나라가 있다. 정견은 전욱의 후손으로서 희성의 료나라가 그의 후손이다. 두 나라의 성은 모두 『세본』에 자세하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그의 주장이 『좌전』의 뜻과 부합한다. 그러나 「초세가」에선 “목왕4년 육나라와 료나라를 멸하였다. 육과 료는 모두 고요의 후손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비록 고요와 정견이 한 사람이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두 나라 모두 고요의 후손이라고 보고 있다.

德之不建民之無援哀哉!: 주석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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