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 성왕의 무례 (춘추좌전.5.22.9.)

11월 병자일(8) 새벽, 정 문공의 부인 미씨와 강씨가 하택柯澤(정나라 땅)에서 초 성왕의 노고를 위로했다. 성왕이 사진師縉을 시켜 부인들에게 포로와 베어 낸 귀를 보여주게 했다. 군자가 말한다. “예가 아니다. 부인은 손님을 맞이하고 배웅할 때 방문을 넘지 않고 형제를 만날 때도 문지방을 사이에 둔다. 군사는 여인들이 가까이할 일이 아니다.” 

정축일(9), 초 성왕이 정나라 도성으로 들어가 향례를 받았다. 정 문공은 구헌九獻의 예를 거행하고 예물 백여 가지를 뜰에 진열했으며, 변과 두에는 여섯 가지 음식을 더했다. 밤에 향례를 마치고 나설 때 미부인이 성왕을 초나라 진영까지 배웅했다. 성왕은 희성의 두 여인을 취해 돌아갔다. 숙첨叔詹이 말한다. “아마도 초왕이 죽지 않겠는가! 예를 거행하는 자리를 남녀 구별이 없이 마쳤다. 남녀의 구별이 없는 행동을 예라 말할 수 없다. 어찌 제 명을 다하겠는가?” 제후들은 이 일로 인해 성왕이 끝내 패업을 이루지 못할 것을 알았다.



원문

丙子晨鄭文夫人·姜氏楚子柯澤. 楚子使師縉示之俘馘. 君子曰: 非禮也. 婦人送迎不出門見兄弟不踰閾, 戎事不邇女器.丁丑楚子入饗于九獻庭實旅百加籩豆六品. 饗畢夜出文芊送于軍. 以歸. 叔詹: 楚王其不沒乎! 爲禮卒於無別. 無別不可謂禮. 將何以沒?諸侯是以知其不遂霸也.


관련 주석 

丙子晨: 병자일은 11 8일이다.

鄭文夫人·姜氏楚子柯澤: 금택문고본에는 “鄭文公夫人”으로 써서 “”자가 더 있다. 음은 미이고 그 글자는 본래 “ ”로 쓰는데 천(음은 천)과 천[1](음이 간)이 초 부수로 하는 글자와는 구별된다. 초나라의 성이므로 미씨는 초나라 여인이다. 강씨는 제나라 여인이다. 거성으로서 위로하다의 뜻이다. 하택은 정나라의 지명.

楚子使師縉示之俘馘: 『정의』: “문헌에 기록된 사광師曠·사조師曹·사견師蠲 등의 부류는 모두 악사이다. 본문의 사진師縉 역시 그렇다.” 장병린의 『좌전독』: “「대사악」에 ‘왕의 군대가 크게 승리를 거두면 한 자리에 모여 개선의 음악을 연주한다(王師大獻, 則會奏愷樂), 「악사」는 또 ‘군대가 큰 승리를 거두면 개선의 노래를 가르쳐 따라 부르게 한다(凡軍大獻, 敎凱歌, 遂倡之).’ 이 문구들은 모두 전쟁에 승리하여 개선할 때 악관들이 하는 일을 말한다. 그러므로 본문에서도 악관인 사진을 시켜 포로와 적의 귀를 벤 것을 대중에게 보여주도록 한 것이다.는 전쟁에서 생포한 포로이다. 의 음은 국이고 죽은 포로들이다. 고대에는 전쟁에서 적을 죽이면 그의 왼쪽 귀를 잘라 증명했다. 괵자는 본래 괵으로 쓰는데, 『춘추』와 『좌전』에서는 주로 괵으로 쓴다. 『좌전·선공2년』의 “생포한 자가 250, 적의 귀를 벤 것이 백여 개(俘二百五十人, 馘百)”는 본문과 같은 부괵俘馘의 일이다. 『좌전·희공28년』의 주석도 함께 참조하라.

君子曰: 非禮也. 婦人送迎不出門: 여기 “”자는 『국어·노어하』의 “계강자가 갈 때 침문을 열고 그와 말을 나누었다(康子往焉, 䦱門與之言)”에서의 “문”자와 같은 뜻으로서 침문을 가리킨다.

見兄弟不踰閾: 음은 역이고 문지방이다. 『국어·노어하』에서 계강자와 그의 종조숙모從祖叔母 얘기를 나눌 때 모두 문지방을 사이에 두고 있는 모습을 서술하고 있다. 공자는 “남녀간의 예를 구별해야”한다고 생각했다. 남녀가 서로 만날 때 옛 사람들은 모두 문지방을 넘지 않는 것을 예라 여겼다. 형제조차 그러했다.

戎事不邇女器.: 가까이의 뜻이다. 고염무의 『보정』는 명대 부손傅遜 『좌전속사左傳屬事』의 “융사 즉 군에 관련된 일은 엄숙해야 하고, 여인들이 가까이할 일이 아닌데 하물며 부인들을 군중으로 들였고 게다가 포로들과 잘라 온 귀를 보여준 것임에랴.”라는 설명을 인용하고 있다.

丁丑: 정축일은 9일이다.

楚子入饗于: 『석경』과 송본, 금택문고본, 그리고 족리본에선 “향”자를 모두 “향”으로 쓴다. 두 글자는 고서에서 통용되었다. 초나라 성왕이 정나라 도읍을 방문했기 때문에 정 문공이 그를 위해 연회를 베풀었다.

九獻庭實旅百: 『국어·진어4: “결국 초나라로 갔는데, 초 성왕이 군례君禮(본래는 “”로 쓰였지만 유월의 주장에 따라 고쳤다)로써 그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구헌과 정실여백……”라는 문구가 보인다. 곧 “九獻庭實旅百”은 제후가 서로 연회를 베푸는 예가 된다. 『국어』의 위소의 주석과 본문에 대한 두예의 주석에선 모두 구헌은 상공의 향례라고 설명하는데, 『주례·추관·대행인大行人』의 “상공의 예……향례에 구헌을 거행하고(上公之禮, 饗禮九獻)”라는 문구에 근거하고 있다. 사실 『주례』의 내용은 『좌전』의 문장과 다 일치하지는 않는다. 구헌九獻이란 주인이 객에게 ‘술잔을 내리고(), 객이 주인에게 ‘술잔을 돌려주며(), 주인이 다시 객에게 ‘술잔을 갚는()’ 일련의 과정을 ‘헌’이라 하는데 이것을 아홉 번 하는 것이 구헌이다. 정실여백庭實旅百『좌전·장공22년』에도 보이는데, 거기서는 제후가 왕에게 하는 것인데 비해 여기서는 정 문공이 초 성왕을 위해 그런 연회를 베풀고 있다. 란 펼치다의 뜻이다. 정실은 뜰에 예물을 진열했는데 그 예물이 백여 가지가 된다는 말이다. 『후한서·반고전』에 “천 개나 되는 예물을 뜰에 늘어 놓고(於是庭實千品)”란 말이 있어 백여 개의 열 배가 된다.

加籩豆六品: 규정된 예 이외에 더하는 것을 “가”라 한다. 『좌전·희공24년』의 “정 문공이 이를 따랐고, 송공에게 향례를 베풀었다. 예를 더하는 것이 예에 맞다(鄭伯從之, 宋公有加), 『좌전·희공29년』의 “개갈로가 왔는데 연회의 예물을 상례보다 더 풍성하게 했다(介葛盧, 禮之加燕好), 『좌전·소공6년』의 “계손숙이 진나라를 예방했는데, 진후가 그에게 연회를 베풀고 예물을 상례보다 더했다(季孫宿, 晉侯享之有加籩)”등이 모두 이 뜻이다. 『좌전·소공6년』에는 또 “무자가 물러나면서 행인을 시켜 ‘소국이 대국을 섬길 때 삼헌三獻 넘을 수 없는데, 이제 예를 과도하게 베푸시니(今豆有加) 소신은 감당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게 하였다.” 가변加籩과 가두加豆 삼헌이나 구헌과는 별개의 것이다. 가변과 가두를 베풀 때는 반드시 작위를 더하는 일이 있다. 『주례·천관·변인籩人』을 보면 “가변加籩에 쓰이는 예물로는 시금치()·연시감()·밤()·말린 고기() 등이 있다.” 「해인醢人: “시동이 아헌할 때 더해 주는 두(加豆之實)에는 미나리무침, 토끼젓, 뽕나무버섯, 육장, 파래무침, 기러기젓, 죽순무침, 어젓 등을 채운다.” 그러나 『주례』에선 다만 네 가지를 언급했는데 본문에선 여섯 가지이니 궤식饋食 변두籩豆·수변수두羞籩羞豆·사변사두四籩四豆 일지도 모른다. 사실 이들 역시 가변·가두라 할 수 있다.

饗畢夜出文芊送于軍. 以歸: 초 성왕이 희성의 두 여인을 취하여 돌아갔다는 뜻이다. 정나라는 희성이다.

叔詹: 장공 17년에 제나라에 억류되었던 정첨이 혹 이 사람일까? 그러나 시간적 거리가 그때와 40년이다. “첨”은 『사기·송세가』에는 “첨”으로 쓰고 있는데, 『공양』과 같다.

楚王其不沒乎! 爲禮卒於無別: 무별無別 남녀의 구별이 없다. 문미와 강씨에게 포로와 적에게 벤 귀를 보여주고, 문미가 성왕을 초나라 군중까지 배웅하며 희성의 두 여인을 취한 일 등을 가리킨다.

無別不可謂禮. 將何以沒?: 숙첨의 말은 여기서 끝난다. 『사기·송세가』: “초 성왕이 이미 정나라를 구원했고 정나라는 그를 위해 연회를 베풀었으며 성왕이 돌아갈 때는 희성의 두 여인을 취해서 갔다. 숙첨은 이에 대해 ‘성왕은 무례를 범하였으니 어찌 제 명에 죽겠는가? 예를 행하는 자리에서 남녀의 구분이 없었으니 이를 보면 그가 패업을 달성할 수 없을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하였다.” 『좌전』의 아래 문구까지 숙첨의 말로 본 것은 태사공의 해석이다. 문공 원년 초 성왕은 그의 아들 상신商臣에게 죽임을 당한다.

諸侯是以知其不遂霸也: 희공 28년 초나라는 진나라에게 성복城濮 전투에서 패한다. 『주서·태자진편』의 “뒤로 물러나 후퇴하였고, 끝내 패업을 완성하지 못했다(逡巡而退, 其不能遂).”에 대해 “수 끝내()의 뜻이다.” 이것은 끝내 성왕이 패업을 완성하지 못했음을 말한다.



[1] 혹시 “간”자의 오류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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